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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들의 세 가지 삶의 모습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20 조회수1,163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도들의 세 가지 삶의 모습

 

- 윤경재 요셉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지구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으나 그 개체 수가 인간만큼 많은 것은 드물다고 합니다. 개미가 인간보다 개체수가 많으나 지구위에 사는 개미를 다 합친 부피와 71억 모든 인간을 합한 부피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미의 종류는 12천 종이나 되지만, 인간은 오직 호모 사피엔스 단 하나의 종만이 지구상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함으로써 두뇌가 커지는데 여성의 산도는 좁아져 출산의 고통이 심하고 생명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대책으로 태아를 미성숙한 채 얼른 출산하고 출생한 뒤에 오랜 기간 성체로 키우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미성숙한 유아를 키우려면 인간은 모여서 사는 사회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뛰고 달리며 생존할 수 있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랜 시간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우고 지혜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유년기는 놀면서 배우고 사회성·창의력을 개발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인간은 이때 얻은 경험을 어른이 되어서도 잃지 않았고 또 살아가면서 얻는 지혜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선순환이 일어났습니다. 이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빙하기와 같은 혹독한 지구적 환경을 이겨냈으며 자기보다 월등히 힘이 센 동물을 지배하며 번식할 수 있었습니다.

 

스승 예수께서 원하시는 이 열둘을 불러 세우신 목적도 첫째가 당신과 함께 지내시는 데 있었습니다. 인간은 혼자 지내면서 삶의 지혜를 깨닫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서로 어울려 지내면서 보고 배우며 깨달아 가는 게 올바른 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혼란한 세계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들이 찾은 답은 세상이 신들의 책략이며 유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우스와 헤라, 아프로디테 등 올림포스 산의 신들이 인간의 마음과 자연을 멋대로 주무르기 때문이며, 헬레네의 약탈로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를 틀어지게 한 것도 다 신들의 조종 탓이라고 보았습니다. 대책 없이 요동치는 세상 사건들의 이면에 어떤 법칙이 있긴 있을 텐데 인간으로서 도무지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 불사의 신들이 저지르는 오묘한장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신들의 유희 속에서, 신들이 부여한 이 숙명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인간의 우정이 그것입니다. 우정을 통해 인간은 연대할 수 있습니다. 신에 대해 저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변함 없는 우정을 통해 서로를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이고, 필멸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불멸하는 신의 속성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특별히 우정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 15,14~15)

 

예수께서 지상의 삶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수를 열둘로 삼으셨습니다. 사실 그보다 많으면 정확한 가르침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열둘은 서로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스승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열둘은 인간 군상의 대표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는 그리스인들의 우정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확장성을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유희하는 신에 대항하는 인간 둘 사의의 우정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생각이라면 예수님의 공동체는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를 향한 전 인류의 사랑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사도들의 두 번째 목적이 파견과 복음 선포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보이신 아빠 하느님의 질서와 사랑을 넘어설 지혜와 가르침은 인류사에 여태껏 없었습니다. 동서양에 출몰한 종교와 사상, 철학은 모두 한계와 부족함을 보였습니다. 그랬기에 예수께서는 그 진리를 제자들이 직접 체험한 후 온 세상에 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추호라도 거짓과 결여가 없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주님을 만나고, 성령체험 후 크게 변한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랐습니다. 그 중에 가장 놀란 점은 로마서 7장에 나오듯 율법과 죄의 인식이 바뀐 것이며, 두 번째로는 성령을 알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15~24)

 

사도 바오로 같은 성령의 사람도 인정하였듯 우리는 늘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악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이런 우리의 약점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들에게 세 번째 권한을 부어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오로처럼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마귀부터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남에게 있는 마귀를 쫓으려다가는 오히려 마귀의 간계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 7,5)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은 바로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이제 평신도들에게도 사도직을 수행하라고 권합니다. 그 사도직의 모범이자 원형이 오늘 복음서에서 천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매 순간 반본환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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