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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은 자는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한다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25 조회수1,184 추천수5 반대(0) 신고


 

깨달은 자는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한다

 

- 윤경재 요셉

 

 

 

 

논어 헌문 5장에 有德者 必有言(유덕자 필유언)’ 이라고 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씀이 있다고 공자께서는 썼습니다. 말씀은 말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자는 이라고 주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은 하늘이 인간에게 본래부터 주신 것을 새로 얻음을 말하니, 곧 깨달음을 뜻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노자 도덕경(道德經)를 깨닫는 책이란 뜻이 됩니다.

 

공자님의 말씀은 즉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 꼭 맞는 본보기가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의 서간에 나타난 언행은 오직 주님께 대한 깨달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오로의 서간이 신약성경 정경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자기를 부르신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어려운 사명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에 합당한 태도를 지키는 데에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의 장점과 약점을 모두 쓰셨습니다. 여러 사람과 협조하는 능력, 사물과 인물을 꿰뚫는 통찰력, 폭넓은 지식, 타인을 염려하는 이해력, 경제적 도움을 바라지 않는 자존심, 지나치게 빨라 두서없어 보이는 머리 회전, 머릿속 표현을 요령껏 말하지 못하는 눌변, 발작하는 병을 앓아 생긴 열등감 등등 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장단점을 모두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을 비우고 전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오로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지금의 그리스도 교회가 바오로 덕분에 생겼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지금의 교회는 바오로의 교회이라고까지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불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동안 자신이 범한 죄를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조금도 감추거나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을 실천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비움과 낮춤을 보고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마저 비우시고 낮추셨는데 하물며 주님을 박해하던 죄인인 자신이 어찌 자신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바오로는 신학자적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하기보다 그가 직면한 구체적인 사목적 필요에 의해 자신이 깨달은바 그리스도를 표현하였습니다. 우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여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게끔 이끌었습니다. 교회와 개개인이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감화로 하나로 연결되며, 진리의 길로 나갈 수 있는 힘을 계속 충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없는 개인의 처지를 밝혔고, 신자들이 하느님의 모상인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뜻하는 의미를 숙고하여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피조물의 구원 의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또 종말론적 비전을 통해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을 구원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회심 축일입니다. 율법주의자 사울은 유다사회를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바꾸고 싶어서 예수를 모시는 잔당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다마스쿠스로 향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목격한 순교자 스테파노와 같은 골수 예수잔당을 뿌리 뽑지 않고는 사회를 혁신하고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말 타고 달리던 바오로에게 주님께서 현현하시어 벼락을 내리치셨습니다. 강렬한 빛에 의해 앞을 볼 수 없게 된 그는 다마스쿠스에 들어가 하나니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놀라운 체험을 아라비아 사막에서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지상 생활하시던 주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도, 아니 주님의 길을 가로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팔푼이 같은 자신을 부르시어 무상으로 은총을 내려주시고 의롭게 만드신 것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신학자들은 의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갔습니다. 개개인도 주님의 성령에 감화되어 주님께서 자기 자신 안에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이런 것을 ‘성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3,24)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갈라2,16)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로마6,19)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2고린3,18)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고린4,16)

 

의로움의 목적은 성화이며, 성화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의롭게 된 이들은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라고 말씀하신 정신을 사도 바오로는 성화라는 말로서 이해한 것입니다.

 

루터가 말하는 칭의론(의화론)은 성화의 완성을 염두에 둘 때 사도 바오로께서 말하는 그 본래 의미를 퇴색하지 않고 성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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