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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5.그분의 증인이 되라 - 파주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25 조회수1,185 추천수0 반대(1) 신고

사도 22, 3-16(사도 바오로 개종 축일)

 

 

 

먼저,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어느 흑인 신자가 바쁜 일 때문에 분주히 다니다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할 수 없이 백인 교회 밖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듯한 문 앞의 노신사의 미소가 무척이나 따스하게 다가왔다. 그는 그 노신사의 미소에 힘입어 교회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서로 인사를 나누르라 시끌벅쩍하던 교회 안이 갑자기 조용해지며, 주위의 시선이 그의 온몸에 꽂혔다. 그리고는 그 백발의 노신사가 엄한 표정으로 다가와 단호한 어조로,검은 피부로는 결코 이 교회에 들어올 수도 예배할 수도 없다고 선언했다. 흑인 신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며,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교회의 ‘모퉁이 돌’을 부여잡고 기도를 하였다.그런데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슬퍼마라.

 

나도 들어갈 수 없는 교회를 네가 어떻게 들어가겠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열심, 그 신앙은 실로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할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참 우습지 않습니까? 속이 텅 빈 껍데기를 가지고도 가장 좋은 열매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그런 이들은 다른 상대의 신앙을 짓밟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렇게 살아왔던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 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부분은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먼저, <앞부분>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간부분>에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가 자신이 이 새로운 길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뒷부분>에서는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귀 기울이고자 하는 것은 아나니아가 바오로에게 했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먼저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 부르심에 우리의 응답이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서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 먼저 선택하신 분이 주님이시며,그에 응답한 이는 그분께 속한 이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이’, 바로 이것이 선택받은 이들의 신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택한 이들이 아니라, 선택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것은 시험을 쳐서 성적이 좋아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 주님의 자애요 사랑일 뿐입니다(신명 7,8 참조).

 

그런고로, 사부 베네딕도는 <규칙서> 4장 21절과 72장 11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규칙서 72,11).

 

 

 

<두 번째> 원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려주시는 분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고, 아무리 보고자 해도 보여주시는 분이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부 베네딕도는 <규칙서> 머리말 30절에서 말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

 

 

 

<세 번째> 원리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 입니다.

 

이제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중인으로 파견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이요,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됩니다.

 

그리하여, 복음전파의 사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일에 소명을 다하는 일이 됩니다.

 

 

 

특별히, 오늘 일치주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위한 소명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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