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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얻은 게 없소 오히려 잃었소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29 조회수1,668 추천수8 반대(0) 신고


 

나는 얻은 게 없소 오히려 잃었소

 

- 윤경재 요셉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어떤 수도자가 오랜 수련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수도자가 머무는 수도원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많이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도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수도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얻은 게 없소. 오히려 잃었소. 셀 수 없이 많이 잃었소.” 수도자의 대답에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괜히 잘난 체하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주시오. 얻은 게 없고 도리어 잃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허허, . 그러면 내가 잃은 걸 얘기해 보겠소. 나는 무지와 환영, 모든 욕망을 잃었소. 또 나는 불행·무의미·절망·분노·비난·탐욕·정욕·시기·질투 이런 것들을 잃었소. 나는 가난하오. 당신들은 아직 부자지만. 이것이 내가 깨달음을 통해 얻은 선물이오.” - 허태수 설교집 자기 포기에서

 

예수께서 주신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산상수훈과 진복팔단의 말씀을 유다교 십계명과 같은 것이라 여기고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세시대부터는 인간이 이해하고 실천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자발적 청빈, 독신, 완전한 순종을 지키는 수도자나 따르는 것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회개만 요청된다는 이중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중세 종교개혁 시기에 와서 마르틴 루터는 이행 불능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산상수훈이 갖는 엄격한 요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깨닫게 하여 죄를 인식하게 하고, 예수님의 필요성을 떠올려 주님을 믿게 해 준다는 생각입니다. 개신교 성서학자 불트만은 예수께서 확실한 실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순종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결단할 것과 철저히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으며, 이러한 요구는 특히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문자 그대로 지키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철저히 변화시키려는 심정적인 의식을 강화한다는 것이며 윤리를 내면화했다고 말합니다. 또 노벨 평화상을 타신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 산상수훈은 종말 때에나 필요한 법으로 평상시에는 그런 정신만 알면 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임박한 종말을 염두에 두고 잠정적 윤리 규정을 선포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마무리 하면서 든 네 가지 비유말씀은 모두 강력한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최후 심판대에 나설 인간들’ ‘바위위에 집짓기등 모두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가르침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심중을 깨닫기만을 뜻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행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중세 이후 인간 이성과 합리성을 주장하는 철학과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진복팔단의 가르침마저 인간적 이해 수준으로 격하해서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해보라고 강제하시거나,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비록 쉽지는 않더라도 관점을 바꾸고, 생각만 바꾸면 가능하기에 이렇게 따라 살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목표를 높이 세우고 어느 정도 노력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포기하고 안 한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양식으로 실재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실재하는 데 (우리가 상상하듯)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괄호를 지우고 읽으면 실재하는 데 실재하지 않는다.’가 됩니다. 모순처럼 들립니다.

 

이런 모순을 직접 체험해 보라고 6세기 불교 선사들은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풀이합니다. 체험은 우리가 어리석음 때문에 비실재를 실재로 착각하는 것이니 비실재를 정확히 바라보고 우리의 착각을 철저하게 부셔버려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그럴 때 실재가 또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공의 언어는 얼핏 들으면 전혀 상관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같고, 문맥을 건너뛰고, 기발한 행위 언어를 포함하게 됩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논리적인 말이 끊어진 자리 그 너머를 쳐다보는 게 공 체험입니다.

 

유다인은 하느님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그 보답으로 현세에서 부와 행복을 누리며 산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며, 이방인이거나 현세에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나쁜 짓을 하여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런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며 오류이었습니다. 이런 하느님나라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리신 처방도 일종의 충격요법처럼 들립니다. 어불성설인 듯 들립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공 체험을 유도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공 체험 언어에 크게 한 번 죽고 난 뒤에 살아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착각했던 눈을 깨어 부수고 참 실재를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되어 진면목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가 성령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십자가 사건이 이 말과 꼭 부합합니다.

 

사실은 우리 각자가 그런 공 체험을 해야 하지만, 하느님께서 너무나도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아드님을 보내시어 확실하고 전무후무한 공 체험을 대신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 언어는 우리 모두를 위한 퍼포먼스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처럼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에 박해를 받았던 사람이 들어가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고,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 몸소 그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협조자 성령을 우리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제 우리가 성령을 거절하지 않고 우리 안에 모시며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음이 가난하며, 슬퍼하며,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며, 의로움에 박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성령과 자주 접속하면 할수록 진리 이해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이 더 쉽게 찾아옵니다. 그럴수록 용기가 생기고 성령칠은이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풍성히 맺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우리의 착각과 어둠을 부수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여유 공간을 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간을 마련하는 행위가 위의 예화에 나오는 수도자가 고백한 나는 얻은 게 없소. 오히려 잃었소. 셀 수 없이 많이 잃었소.”라는 말인 것입니다.

 

진복팔단에서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획득하려고 노력해서 얻기보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상태입니다. 신의 속성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일상에서 살아갈 때 신비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행복과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행복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0에 수렴한다고 합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얻는 행복의 합은 +- 해서 0 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영원히 반복되며 그 크기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늘 +이니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무상으로 주신 성령을 받아들이고 일하실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그런데 잘 못 닦으면 유리창에 서리가 끼듯 마음에도 찌꺼기가 남습니다.

 

율곡 이이는 마음에 찌꺼기가 남는 이유를 네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가 기대심(期待心)으로 무슨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에서부터, 특정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욕심이 여기 포함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잡동사니입니다. 둘째 훈습(薰習)입니다. 과거의 사건과 기억에 매달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은 늘 현재에 머물러야 합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셋째 편견(偏見)은 마음에 무엇인가가 미리 점유하고 있어서 새로운 것이 못 들어오게 합니다. 선입견이라고도 부릅니다. 넷째 부념(浮念, 뜬생각)입니다. 부념은 시의에 맞지 않는 쓸데없는 상념이나 분심으로 비록 착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얽매게 만들어 자유를 훼손합니다. 이 중에 부념이 가장 떨쳐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는 이런 마음의 찌꺼기를 내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혐오하거나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 되며 가볍게 몰라’, ‘괜찮아하며 생각을 떠나보내어 포맷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이런 방법과 상태를 장자는 좌망(坐忘)이라고 불렀습니다. ‘쉬며 떠나보낸다.’는 뜻입니다.

 

비근한 예로 욱하고 화를 잘 내거나 분노하는 상황에 잘 빠지는 사람이 취할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 성격을 고치는 게 아니라 그 자리를 피하는 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부딪치면 뒤가 괴롭습니다. 몰라’, ‘괜찮아하며 여유를 갖는 게 피하는 방법입니다.

 

내 에고가 성령과 부딪쳐 못마땅한 느낌이 들거나, 선뜻 성령의 움직임에 동의하지 못할 때, 내 에고의 욕심에 따르고자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그때는 주저하지 말고 입으로 조용히 몰라’ ‘괜찮아하고 마음을 포맷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잠시 뒤에 성령의 목소리가 커져 자신을 이끄시도록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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