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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옹졸하고 열리지 않는 마음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30 조회수1,336 추천수11 반대(0) 신고

 

 

 

옹졸하고 열리지 않는 마음

 

- 윤경재 요셉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마르5,1~20)

 

 

 

 

어떤 사제의 고백입니다. 어렸을 때, 그분이 살던 동네에 가끔 미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동네 꼬마들이 다 몰려나와 그 미친 여자에게 돌을 던지거나 치마를 들쳤습니다. 어느 날, 그분도 같이 그 여자를 놀리다가 집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외쳤습니다. “엄마, 우리 동네에 미친 여자가 왔어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이모가 오기로 했는데 지금 왔나보다. 가서 데리고 와라.” 이모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고, 그 미친 여자를 이모라고 부르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주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여자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저기요. 엄마가 빨리 집으로 오래요!”

 

그 이모라는 여자가 집에 오자 어머니는 따뜻한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후에 정성껏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그는 그 여자가 진짜 이모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머니 때문에 그 여자가 다시 동네에 나타나도 감히 놀려대지 못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신도 사랑과 봉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의 기준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다 치우쳤고, 다 미쳤고, 다 시궁창 냄새가 납니다. 그런 치우친 존재가 절대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올바른 존재로 받아들여집니다. 주님의 절대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비천하거나 열등하게 보지 않고, 연약한 사람을 오히려 나의 이모로 생각하며 섬깁니다. 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친절은 행복의 첫째 조건입니다.

 

강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외강내유한 사람이 되지만, 약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외유내강한 사람이 됩니다. 강자의 눈에 들면 권력과 재산이 다가오지만 약자의 눈에 들면 사랑과 진리가 다가옵니다. 강자를 살피면 눈치가 늘어나고, 눈치는 눈총을 부릅니다. 반면에 약자를 살피면 염치가 늘어나고, 염치는 은총을 부릅니다.

 

작은 성공은 강자와 약자의 구별을 즐기는 삶이고, 큰 성공은 강자와 약자의 구별을 철폐하는 삶입니다. 작은이를 실족시키는 것은 자신이 실족으로 가는 길이고, 작은이를 만족시키는 것은 만족으로 가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크려면 강자에게 아부해야 하지만, 영적으로 크려면 약자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한 삽화에 두 가지 주제를 병행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라사인 땅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악령을 물리쳐 이기시는 이 장면도 그렇습니다. 그랬기에 마태오나 루카복음서보다 절수도 많고 내용도 깁니다.

 

본디 악령은 혼자서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약해 빠졌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집단으로 목소리를 냅니다. 악령들은 자존감이 결여되었기에 끼리끼리 모여야 기를 폅니다. 악령의 이름이 군대라고 하는 것도 이런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반대로 군대처럼 집단으로 모이면 자칫하다가는 악령의 유혹에 빠져 자제할 힘을 잃고 개개인에게 해코지 할 위험이 커진다는 걸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화에 나오는 더러운 영이 보이는 모습이 깡패라든가 패거리 행태라는 단어와 꼭 부합됩니다.

 

심지어 더러운 영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라고 감히 예수님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거렸습니다. 주제파악을 전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말이 꼭 들어맞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작당을 하면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게 되는 가 봅니다. 자신 안에서 분출되는 욕망의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라고 착각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역시 눈치가 눈총을 불렀습니다.

 

마르코복음서 4~9장은 사람들과 제자들마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는 여러 모습을 보여주며, 예수께서도 다섯 번에 걸쳐 이런 자세를 질책하셨습니다.

 

게라사인들도 예수께서 더러운 영을 물리치고 사람을 구해주시는 권능을 체험하였으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물에 빠져 죽자 자기네로부터 떠나달라고 부탁합니다. 세상 걱정과 욕심에 파묻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되는 현장을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외형적 사물에 마음을 쓰는 태도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눈을 멀게 만듭니다. 어느 것이 더 인간의 길에 합당한지 판단할 기준이 흐려지게 됩니다. 루카복음 1220,21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라는 말씀이 적절한 지적입니다.

 

논어 향당편 12장에 비슷한 예화가 있습니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께서 조정에서 돌아와 말씀하셨다. 다친 사람은 없느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공자님 시절 말의 값어치는 매우 비쌌습니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면 아마 여러 마리 말이 죽거나 다쳐 피해가 엄청났을 겁니다. 그리고 불이 난 자초지종도 궁금했을 터인데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저녁에 일을 마치시고 퇴청하시어 오로지 인명 피해가 없었는지 물으셨습니다. 공자님의 이런 태도는 인간이 무엇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지 가리켜 보이는 본보기입니다.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런 자세 때문에 성인으로 추앙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대목 묵상나누기를 하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남의 재산인 돼지에게 더러운 영이 들어가도록 허용하셨는지, 그것도 이천 마리나 되는 어마어마한 수효인 데도요. 아마도 게라사 지방 사람들 전 재산일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서 그러셨는지 묻습니다.

 

이는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라는 가르침이며 공자님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이방인을 폄하하는 자세는 아닙니다.

 

누구에게는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고, 누구에게는 성경이 ‘남의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고 과녁이 되어 수없이 맞아 본 사람은 차츰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루카복음서 58절에 시몬 베드로도 예수님 지시대로 그물을 내리자 고기가 셀 수 없이 그물 한가득 잡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인간의 얕은 심정은 놀라운 신비를 맞닥트리면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법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옹졸하고 열리지 않는 마음이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열린 마음을 지닌 사제의 어머니는 평생 귀감이 되는 본보기를 아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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