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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2.0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1 조회수2,292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7년 2월 1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 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복음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다가 앞에 나서서

진행을 보고 있는

 동창을 가리키며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공부도 잘 못하고 찌질이

 같았는데, 많이 컸네.”
그러면서 진행하는 친구의

과거에 별 볼 일 없었던

모습만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순간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 친구가

 ‘찌질이’처럼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분명히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아주 인기가 많았던 친구였지요.

반면에 진행을 보는 친구는

무엇 하나 잘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소위 초등학교 때에 잘 나갔다고

자부하는 이 친구는 “왕년에...”를

외치는 과거에만 머물며 살고 있었고,

초등학교 때에는 별 볼 일 없었던

 친구는 지금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머물며 살면 분명히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을

잘 살아야 하는데,

 “그때가 좋았지.”라면서

 과거 속에만 살려고 하니

어떻게 지금을

잘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과거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지금을 충실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은인을 만나야 할까요?

과거에만 살고 있다면,

그 누가 도움을 주겠다며

오더라도 내 삶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바로 나만이 지금의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철학자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의 안쪽에만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자신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강제로 열거나

닫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과거의 한 순간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별 볼 일 없었는데,

지금의 이 대단한 모습에

시기와 질투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기적은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종종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놀라운 기적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만 머물러 있으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을 바라보지 못하고

또 살지 못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오고자 한다면,

 먼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헤겔의 말처럼

문을 여는 손잡이가 마음의

 안쪽에 있기 때문에,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손잡이를 잡고

과감하게 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과거에만 머무는

내가 아닌 지금을 힘차게

살아가는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제 더는 당신이 원했던 것들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세요."

(파울로 코엘료)

찌질이의 유형.

"어디를 바라보면서

사시겠습니까?"

공부에 대한 열등감을

가졌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더 공부를

잘 하는 친구를 부러워했고,

 ‘나는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할까?’

를 계속해서 되뇌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보았던

시험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던 저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공부가 재미있었을까요?

제일 재미없고

싫은 것이 공부였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모든 것을

 다 공부와 연결하다보니

책을 보는 것도 싫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성적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신학교

생활 자체가 더 재미있었고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 그렇게 싫었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더불어 공부 자체에도 재

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을 자신감

넘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면서 사시겠습니까?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신학과 1학년 때의 사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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