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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1."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 파주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1 조회수1,488 추천수0 반대(0) 신고

마르 6,1-6(연중 4주 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혹 우리도 더러는 사회적으로는 존경받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이들,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남편, 내 아내,내 자식으로부터는 존경받지 못하지는 않나요? 그리고는 마치 이 성경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반대편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나는 왜 내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친척, 내 집안, 내 부모 형제를 존경하지 못 하는가?

 

 

 

너무도 잘 알아서 그럴까? 그런데, 나는 그를 진정 잘 아는 걸까? 더 잘 알기에 더 존경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왜, 더 잘 알게 되면 오히려 존경하지를 못하는 걸까? 감추어지고 위선적인 면이 드러난 까닭일까?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 이유는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우리 곁에 있는 내 동료, 내 형제를 존경하지 못한 이유를 내 형제에게서 찾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놀라워하였다’는 이야기는 보고 알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신적 권위와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놀라워하였지만, 그분이 목수이기에, 마리아의 아들이기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안다’고 해서 반드시 ‘믿는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니 ‘안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왜일까?

 

왜 우리는 가까운 이나 함께 살고 있는 이를 존경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그를 안다’는 생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 ‘내가 아는 그’라고 믿어버린 선입감에 빠진 까닭이 아닐까?

 

사실, 우리가 아는 지식과 정보와 재료는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으니, 그 아는 것은 결국 하나의 편견일 뿐이요, 자기 생각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이요 고착일 뿐일 것입니다.

 

아니, 나아가 제대로 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 그것을 섬기고 따르고 마는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일 것입니다.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생각에 가려 진면목을 알지 못한 무지일 뿐이요, 오히려 곡해와 왜곡과 몰이해일 뿐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질투와 시기, 비교와 경쟁, 이해타산의 이해관계가 있고, 믿음이 아닌 의혹이 있고, 신뢰가 아닌 따짐이 있고, 의탁이 아닌 계산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지를 우리는 흔히 ‘무지의 지’라고 일컫습니다. 이른바 ‘현명한 무지’ 입니다.

 

 

 

사실, 자신이 ‘안다’는 생각, 그 생각은 곧 우상에 지나지 않을 뿐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진정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은 바로 믿고 받아들임에 달려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마르 6,6) 당혹스럽고 안타까움으로 놀라워하셨습니다. 마치,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고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 앞에 선 것처럼, 당혹해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의사는 치유의 능력이 있건만 환자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혹해하시지 않으시도록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서야할 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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