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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신의 삶을 그분께 의지하는 삶을 /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3 조회수1,369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복음에서 탄생과 죽음에 대해 나름으로 상세히 기록된 이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일 게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 6,17-29 참조)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버금가는 처절함과 억울함이 녹아 있다. 헤로데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임금이었지만 한평생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던 이라 여겨진다. 그는 정치적인 입지를 위한 정략결혼으로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챘다.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간언할 때에도 두려워하였지만, 함부로 하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생일잔치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하자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결국은 그 애가 요한 세례자의 머리를 요구하자, 그는 시선이 두려웠지만 끝내 이에 응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드디어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며 몹시 두려워한 이다.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시선을 두려워한 것 같다. 한마디면 모든 결정을 할 절대 권력자였지만, 늘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반면 세례자 요한은 주위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였다. 그렇기에 감히 그 여우같은 그 헤로데에게 간언하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는 어떨까? 정녕 하느님을 두려워할까, 아니면 주위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면서 속 좁은 이 마냥살아가고 있지나 않을까?

 

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토마스 모어 성인이 생각난다. 그는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이었다. 당시 국왕인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재혼할 생각으로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는 데 토마스 모어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이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성인은 교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찬이슬로 처참하게 참수당하고 만다. 성인은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대가로 그 지존한 생명을 내놓았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했다. 토마스 모어 성인도 세례자 요한처럼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성인은 권력의 어떠한 횡포 앞에서도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교회는 그를 기억하고 그 삶을 본받고자 1935년에 시성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의는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믿자.

 

한 나라를 통치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세와 체면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직접 예수님을 신문했기에 그분께 죄가 없으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결국은 죄수였던 바라빠를 놓아주고, 무고하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하기 그지없다. 바른말을 하다가 죽었기에. 그런 일은 역사 안에 수없이 많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한마디했다가 불이익을 당한 이를 금방이라도 찾아낼 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메시아의 앞날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실 그 길을 준비하러 왔기에.

 

우리는 살면서 숱한 억울함을 체험한다. 억울함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지?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탓이리라. 현실 역시 언제나 부정확하고 엉성하기에. 하지만 때로는 그게 정상적이고 본디 그런 곳으로 여겨지기도. 그러기에 우리는 공평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산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 그게 오신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것임을 알았을 것이리라. 오늘 헤로데의 모습에서 한 인간의 가장 초라한 모습을 엿본다. 결국 체면과 자기기만에 빠진 헤로데의 결정으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위대한 예언자는 한순간에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그러므로 인생의 억울함을 받아들이면 세례자 요한을 닮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주님의 섭리이다. 악연도 이끄심이 있을 수도. 인연에 담긴 신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체면이나 자존심, 인기에 휘둘려 살다 보면 영혼이 없는 이처럼 될 게다. 자신의 이런 모습은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정의와 평화의 역할을 잃어갈 게다. 우리는 헤로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게 되리라.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한 권력자에 의해 끝나 버린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본다. 그리고 권력과 욕망을 지키기에 급급한 나약한 헤로데와는 정반대로, 하느님 섭리 안에 자신을 맡긴 요한의 삶을 본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려고 광야에서 회개를 바란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께서 권력의 희생양이 되실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하느님 섭리는 인간의 의지를 넘는다. 때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그분께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을 잊지 말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태그 헤로데,헤로디아,세례자 요한,토마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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