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2.0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4 조회수1,777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7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 13,15-17.20-21

형제 여러분,

15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16 선행과 나눔을

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7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제가 본당신부로 있을 때

보았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미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성당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있었던 한 아빠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자기

아들의 그림을 도와주더군요.

그 그림은 아주 멋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러 온

한 엄마가 그 그림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그린

그림을 번갈아서 보더군요.

자기 아들이 그린 그림은

알 수 없는 추상화처럼 보였지만,

 옆의 그림은 정말로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갑내기 친구는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데,

 자기 아들은 왜 이렇게

못 그릴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눈치를 챘는지

그 아빠는 자매님께

얼른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그림은 제 아들이

그린 것이 아니고요.

너무 형편없어서

 제가 도와 준거에요.”
그 순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럼 그렇지.

내 아들이 그렇게

뒤쳐지는 것은 아니지.’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자신의 자녀가 다른 집

자녀보다 뒤쳐지는 것 같으면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또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고유한

재능과 능력이 있지요.

무엇이든 다 잘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보다 못하고

뒤쳐진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남보다 못하고

뒤처지면 뭐 어떻습니까?
남들과 비교하고 우위에

서려는 마음을 통해서는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비교하면 할수록 열등감과

함께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질투심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들과 비교하고

우위에 서려는 행동에

바빠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남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데

바쁘다면 어떨까요?

마음의 진정한 평화와 함께

참된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모범을 주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시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얼마나 바쁘면 밥 먹을

시간도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는데

 그토록 바빴을까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서기 위해서 바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렵고 힘들어 하는

 이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데

바빴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쁘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왜 바쁘십니까?

나를 위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바쁘다”를

외치는 것은 아닐까요?

그보다는 주님의 뜻을 위해,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바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폴 틸리히)

무엇으로 늘 바쁘십니까?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처음 운전면허를 따고 얼마 뒤에,

동창 신부가 운전을 가르쳐 준다면서

자기 차의 운전대를 제게 맡겼습니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차가 기어 변속이

 자동으로 이루어지지만,

제가 처음으로 운전한 차는

클러치가 달려 있는 수동으로

기어 변속을 하는 차였지요.

정말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어 변속을 하다가 시동을

몇 차례 꺼트렸고,

또한 속도를 높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시속 60Km인데도 마치

시속 200Km의 속도를 내는

스포츠카를 모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온 정신을 운전대에

쏟아 부으면서

정성을 다해 운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운전 경력이 20년

가까이 되고 있는

지금은 어떨까요?

아직도 시속 60Km의 속도를

어마어마한 속도로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지금은 너무

느리다면서 투덜대고 있지요.

 또한 초보 운전 때처럼

정성을 다해 운전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지요.

실제로 운전이 미숙한

초보 운전일 때에는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능숙하게 되었을 때

 사고가 난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이것저것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 주님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온 힘을 주님께 쏟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하고

신앙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이것저것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교회 내의 부정적인 모습도 보고,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까지 간섭합니다.

바로 이때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사고가

날 수 있을 때인 것입니다.
안전 운전을 위해

초보 때를 기억하라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주님을

 처음 만난 그 순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초보신앙일 때를 잊지맙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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