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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금 계약과 빛의 창조
작성자김리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4 조회수1,862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7년 가해 연중 제5주일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복음: 마태오 5,13-16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1400)

 

라이언은 기차에서 깜빡 잠이 들어 형과 헤어진 다섯 살 사루가 호주로 입양된 후 20년 뒤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형과 엄마를 찾아낸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겠지만 구글어스라는 지도 프로그램을 알게 되면서 그것을 이용해 자신이 발견된 기차역 주위 밤새 갈 수 있는 거리를 계산하여 자신의 잃어버린 고향을 찾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거듭되면서 그의 삶도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 좀 하고 현실로 돌아오라는 말 앞에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금도 매일같이 내 형과 엄마가 날 찾고 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내 형이 얼마나 내 이름을 외쳤겠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네가 짐작이나 해? 반드시 찾아낼 거야.”

더 이상 지도를 볼 힘도 없어졌을 바로 그때 비로소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던 동네 이름과 비슷한 곳, 자신이 살던 바로 그 시골 동네를 찾아내게 됩니다. 물론 25년 만에 자신의 어머니와 형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 현실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를 사랑해주는 양부모도 있고 애인도 있고 친구도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와 형의 고통을 모른 체하고 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희망이라도 없었으면 모를까 가장 깊은 뿌리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자신의 뿌리를 잊고 세상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수평적인 관계 이전에 수직적인 관계가 먼저 세워져야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되라고 하시지 않고 그냥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늑대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소금이라 부르시는 것은 우리 스스로 다다를 수 없는 어떤 본성에 다다랐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다시 짜게 할 수 없어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짓밟힌다는 말은 세상에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반대가 되는 말이 입니다. 빛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먼저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소금이 되지 않으면 빛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십자성호를 그을 때 소금이 세로의 관계라면 빛은 가로의 관계로 불 수 있습니다. 부모를 찾지 않으면 다른 인간관계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부모가 늑대라고 여기는 사람이 사람과의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이 소금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소금은 짠 맛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소금이면 짜고 아니면 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금이 짠 맛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뜻은 누군가가 우리 안에 넣어준 소금의 맛이 자신의 잘못으로 그 짠 본성을 잃어버릴 수 있고, 만약 그 맛을 잃었을 때는 스스로는 다시 짜게 하지 못하여 결국 사람들로부터 짓밟히는 신세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소금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소금은 관계, 혹은 계약과 관련됩니다.

너희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소금 계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신 것을 알지 않느냐?”(2역대 13,5)

주님은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소금 계약이라 하십니다. 소금이 누구엔가 뿌려지면 그 사람은 무언가 다른 존재로 급상승변화를 겪게 됩니다. 소금은 예배 내에서 무언가를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너는 향 제조사가 하듯이, 이것들을 잘 섞고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만들어라.”(탈출 3,35)

우리는 어떤 것을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는 힘이 바로 성령님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와 물인 성령님으로 혼인계약이 맺어진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금을 성령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지옥의 고통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48-50)

소금은 성령님인데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힘이 되시는데, 그 성령님께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주와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피이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나의 자아입니다. 내가 그분을 죽였고 내 죄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한다면 그 죄 자체는 십자가의 피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나 때문에 부모님이 피땀을 흘리며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그 부모님의 피땀은 죄를 지으려는 내 자아의 저주가 되어 자아를 죽입니다. 그래서 이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아를 죽이지 못한 이들은 자아와 하나가 되어 완전한 마귀가 되어버리고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한 저주의 원인이 되어 그 좋은 소금 때문에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원수는 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피로 우리 자아를 죽여 그분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혼인계약을 맺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

아이는 먼저 부모를 찾아야 이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소금계약으로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만 이제 자신을 태워 세상에 도움이 되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과의 합일로 소금의 짠맛을 유지하며,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착한 행실이란 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법정 스님도 착한 행실을 하였고 간디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착한 행실이 단지 세상이 말하는 선행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착한 행실의 의미를 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소금계약을 맺은 사람들의 어떠한 행위가 착한 행실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착한이란 형용사는 칼로스(kalos)’로서 아름답다, 좋다라는 히브리어 토브(tob)’를 희랍어로 옮길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칠십인역(LXX)에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는 좋았다(tob)”보시니 좋았다(kalos)”칼로스(kalos)’라는 형용사를 써서 번역합니다. 그리고 첫째 날 창조하신 것이 입니다. 따라서 빛이 창조되는 것을 좋다(아름답다, 착하다 = 토브, 칼로스)라고 하신 것입니다.

참 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실이 어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 자신을 불사르시어 세상에 불을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성령의 부어주심이라 말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이란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금인 성령을 다시 또 누군가를 창조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뿌리는 행동인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나를 통해 이웃에게 옮아 붙어 그도 소금으로 짜게 되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착한 행동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착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를 들어 높이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착한 행실은 반드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내 피를 이웃에게 쏟아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주님께 칭찬 받을 착한 행실인 것입니다.

 

어머니 무릎 수술을 위해 하늘병원이란 곳을 찾았습니다. 그 조성연 요셉 원장님은 김현아, 손연재 선수 등의 주치의로서 김현아 선수가 세례를 받도록 가장 큰 영향을 준 매우 열심한 신자분이십니다. 저희 어머니가 한 사제의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해 주신다고 하여 인사차 잠깐 들렀습니다. 원장님을 만나려고 하는데 결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원장실 앞으로 줄을 쭉 서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하니까 기다리시는 분들이 저는 들어가도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매우 바쁜 시간이었는데 원장님은 신자 서넛과 원장실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예비자도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친절하게 함께 기도하는 신자분들을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주님과 기도로서 소금계약을 완성해가고 그 성령을 이웃들에게 쏟아 부어 주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창조되도록 돕고 있었습니다. 저도 부끄럽게 느끼질 정도로 주님께 충실할 때는 그 시간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그 받은 은총을 주님 영광을 위해 쏟으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이런 분이 소금과 빛이 아닌가 생각을 하였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만드신 이유는, 그 소금계약을 통해 우리가 당신과 한 몸이 되어 거룩하게 되고 그 빛을 통한 창조를 통하여 당신 사업에 동참함으로써 그 영광도 함께 나누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참 소금이요 빛이셨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길은 그분의 짠 맛을 우리가 품고, 그분의 빛으로 우리가 타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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