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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녹거나 빛나거나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5 조회수2,024 추천수9 반대(0) 신고


 

녹거나 빛나거나

 

- 윤경재 요셉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3~16)

 

 

 

예수께서 왜 소금과 빛의 비유를 한꺼번에 드셨는지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소금은 안으로 녹아드는 성질이 있고, 불빛은 밖으로 드러나야 제 역할을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어느 때는 상대에게 녹아들어야 제 몫을 하는 것이며 어느 때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야 합니다. 물질은 대개 한 가지 특징만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녹아드는 역할을 할 수도, 앞장서 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마치 한의학에서 음양론을 가지고 인체의 오장육부 역할을 논하듯이 예수께서도 소금과 빛으로 사람의 사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설 때와 녹아들 때를 구분하여 처신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구에는 밤낮이 있어 온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기운을 소통합니다. 지구는 네 계절을 바꾸어 가며 만물 안에 담긴 생명을 키우고 가꿉니다. 우리도 지구처럼 자신 안에 담긴 생명력을 지키면서 성장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생명의 에너지는 파동처럼 움직이며 흘러갑니다. 한 번은 녹아드는 음적 에너지이며, 한 번은 드러나는 양적 에너지입니다. 계속해서 한 쪽 에너지만 받으면 움직임이 사라져 결국 얼음처럼 차가워지던가. 태양처럼 끓어 넘치게 됩니다.

 

음양은 한 쪽이 점점 강성해지면 다른 쪽은 그에 맞춰 수그러듭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반대 현상이 벌어집니다. 강한 자가 약해지고 약한 자가 강해집니다. 자연은 욕심내지 않고 자리를 양보하며 물 흐르듯 흘러갑니다. 이렇게 순환하는 음양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마음이 안달복달하여 세파에 휘둘리는 일이 적어집니다. 아무리 험한 파도가 몰려와도 곧 물러나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상태가 쾌조의 오르막일 지라도 조만간 퇴조하는 게 바른 이치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음양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를 제때에 낼 줄 압니다. 원인과 결과를 한 덩어리로 볼 줄 아는 시선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각각 독립적인 별도의 두 사건으로만 파악한다면 불안감과 두려움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어둠이 가시고 나면 밝은 날이 온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음양의 이치처럼 모든 것이 한 사건의 양 국면이라 생각하면 불안감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저절로 생깁니다.

 

용기라는 영어 ‘courage’는 심장을 뜻하는 라틴어 ‘cor’에서 유래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멈추지 않는 심장의 박동처럼, 용기는 위험 앞에서 드러나는 강인함, 씩씩함, 인내력, 의지 등을 의미합니다.

 

악랄한 독일 나치의 치하에서 유다인 두 랍비가 동포들에게 정신적 도움을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두려움에 떨면서,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여러 유다인 공동체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두 랍비는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한 랍비는 앞으로 닥칠 일을 두려워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았으나 다른 랍비는 하루 종일 누워서 잠만 잤습니다.

 

어찌 잠만 잘 수 있소?” 두려움에 사로잡힌 랍비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두렵지도 않소?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험한 일이 닥칠지 모르겠단 말이오?”

 

우리가 체포되기 전까지는 나도 마찬가지로 두려웠소. 이제 이렇게 잡힌 몸이니 두려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두려움에 떨던 시간은 지나갔소. 지금은 용기를 내어 운명과 맞설 시간이오.”

 

예수께서 소금과 빛의 비유를 드신 것은 진복팔단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직후입니다. 아마도 진복팔단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렵더라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소금과 빛의 이치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이 지닌 성질, 즉 자기를 내어주는 정신을 닮아 자기를 버리고 세상에 나아간다면 진복팔단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다고 이끄셨습니다.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밭에 심어진 배추가 김치가 되어 맛을 제대로 내려면 다섯 번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두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되어서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 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냅니다.

 

우리는 비우고, 부서지고, 죽는다는 말을 듣기만 하여도 두렵고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원인과 결과를 동떨어진 별개의 사건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비우고, 부서지고, 죽을 때 오는 고통만 무겁게 다가오기에 그 다음에 올 국면변화가 인식되지 못하고, 기쁨의 선물을 깨닫는데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게 그런 기쁜 상황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음적 에너지에 빠지면 영원히 지속되며 다시는 양적 에너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자기 멋대로 우주의 이치를 재단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행복이 한 동전의 양면이라고 볼 줄 안다면 아주 짧은 시간만, 눈물 한 방울쯤 흘리고 마를 시간만, 아파하고 말 겁니다. 그 뒤에 다가올 희망의 소식에 용기를 낼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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