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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녀 교육의 어려움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9 조회수1,635 추천수10 반대(0) 신고


 

자녀 교육의 어려움

 

- 윤경재 요셉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7,27~29)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구절입니다. 이 대목도 우리가 묵상할 때 자주 걸려 넘어지는 지점입니다. 보통의 우리 생각과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마르코 복음서 7장과 마태오 복음서15장에 병행하여 출현합니다. 그런데 두 복음서에서 설명하는 뉘앙스가 제법 차이가 납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전개되는 구조가 단순합니다. 예수께서 티로 지역에 가셔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는데 예수님 의도와 달리 숨어 계실 수 없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걸린 딸을 둔 여인이 찾아와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다른 조건이 전혀 걸리지 않았고, 그 여인의 상태를 보신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은 네 딸이 마귀에 들린 이유가 네게 있는데, 딸을 배불리 먹이지 않고 다른데 낭비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직설적인 지적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사태 파악을 하고 어떤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먼저 딸에게 빵을 배불리 먹이겠으니 딸이 던져주는 부스러기가 있다면 강아지도 얻어먹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네 딸에게 변한 너의 모습을 보여주면 금세 마귀가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는 구문이 달라지고 상당히 복잡해졌습니다. 우선 그 여인을 가나안 부인이라 칭합니다. 또 그 부인은 아주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이 없으시자 보다 못한 제자들이 나섭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께서 비로소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상당히 원론적인 말씀입니다.

 

그 여자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듣기에 따라 상당히 거북한 말씀입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마르코 복음의 말씀은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말씀이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리송하게 들립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파견되었으니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빵을 던져주는 것이 아직은 옳지 않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마르코복음서처럼 가나안 부인이 그 딸에게 그런 식의 행동을 보인 것을 지적하신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즉시 예수님 말씀을 아주 강하게 긍정합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믿고 원하는 것은 얻겠다는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또 복음서는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마치 가나안 여인의 강한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종용한 것처럼 나타났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 대목에 연이어 빵 일곱 개와 물고기 조금만으로 군중을 먹이시는 장면을 기술하는데 구체적 장소와 인원수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배를 타고 마가단 고장으로 가셨다.’라고 부기합니다.

 

추측하건대 마태오 저자는 가나안 부인의 강한 믿음이 시발점이 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기적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같은 사건을 두고 두 복음서 저자가 다른 주제로 전개하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세계에서는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하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이 어렵다보니 연달아 나오는 현상으로 연애포기, 결혼포기, 집장만 포기 마지막에는 자녀를 낳지 않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막상 애를 낳고서도 잘 기르고 키우는 것이 여간 힘겹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 양육과 교육 문제의 어려움이 비단 요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 탄생 이래 계속 유전되어 내려온 어려움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탄생되기 때문에 오랜 기간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제대로 성장하고 성숙되는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는 데에 늘 어려움이 따랐고 누구하나 그 완성을 이룩할 수 없었습니다. 미성숙한 부모가 미성숙한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악순환이 반복해서 일어날 뿐이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런 이유로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대물림하여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몸만 어른이 되었지 지성과 마음이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내면에 내재해 있다가 그 상처를 다음 세대로 물려준다는 설명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도 내면에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영적, 심리적 배고픔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의 삶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자신의 딸에게는 온전한 사랑을 베풀지 못한 것입니다. 현대에서 자주 보는 여성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자기 인생의 완성을 최우선하다 보면 자녀에게 가는 애정이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의 기준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어린 자식에게 맞추어져야 하는데 늘 자기 자신이 기준점이 되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랑(?)이 지나쳐 어린아이에게는 구속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행동은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욕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사랑의 중용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처음 몇 년 동안은 아이는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이제는 아이를 놓아주는 일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놓아주기 첫 단계가 거리두기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자녀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기 힘들어 합니다. ‘염려놓아주기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잡는 일은 어머니에게 일생에 걸친 과제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을 독차지 하려는 성격을 보였는데 그 모습을 자기 딸에게도 그대로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그리고 곧바로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녀의 딸이 더러운 영에 걸린 이유는 딸이 원하는 사랑을 제대로 배부르게 받아먹지 못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딸에게 갈 사랑을 자기의 강아지, 즉 자기의 애착 대상에게다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어떠해야 한다는 자기만의 허상을 만들어 놓고서 그 허상에게다 자신의 온 정력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자리잡은 상처받은 어린아이에게 빵을 공급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자식은 배가 고픈지 부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지적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여인은 자신의 딸과 어떤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옳은지 예수님께 확인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어가 달라졌습니다. 자식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애착이었던 강아지는 이제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자식이 배불리 먹고 난 뒤 부스러기가 남아있을 때, 또 부스러기를 자식이 기꺼운 마음으로 던져줄 때 강아지는 배를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악마는 딸에게서 물러나고 자신을 짓눌렀던 죄책감도 사라질 것이며 머지않아 딸이 독립한다면 그녀는 멋진 할머니라는 새로운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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