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2.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09 조회수2,019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7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 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 마르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종종 자신이 얼마나

고통으로 힘들어하는지를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통의 이유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고통의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에 따라

행복의 유무로 결정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이 10개 이상이면

 불행하고, 그 이하이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 가지 일에 자신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면서 좌절 속에

빠져버리는 분이 계십니다.

그에 반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다 안고 있는 것

같은데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사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떠올려 볼 때,

고통의 크기에 따라서 또 고통의

숫자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고통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고통과 시련 속에 살고 있다고 해서

 불행한 삶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미래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피부에 상처가 나면 몸 안에서 평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반응에 따라 피가

응고된다고 합니다.

혈액의 응고라는 현상 덕분에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을 막을 수가 있지요.

이렇게 혈액의 응고는 우리 몸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혈액의 응고가 과도하게

이루어져서 관상동맥을 막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심장마비로 이어지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성숙하게

극복하는 사람은 적당한 혈액의

응고를 통해 몸의 치료를

가져오는 사람과 같지 않을까요?

하지만 고통과 시련 안에 머물면서

 불행하다고 외치는 사람은 과도한

 혈액 응고로 위험해지는

 사람처럼 몸에 계속해서

해를 가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인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아픔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갔는데 오히려

개에 비유하는

모욕적인 말까지 듣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님께 ‘나쁜 사람’이라면서

 원망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어쩌면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짓는 사람이 아닐까요?

고통과 시련에 대해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시간으로 단정 짓는다면 이 역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이방 여인의 모습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대다수가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에서 깨달은 내면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양심과 진실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말라.

이렇게 산다면 인생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내 마음이 파도치는 바다와 같지는 않나요?

"잘 살아가는 방법"

법정 스님의 잠언집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무엇이 되어야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 갈 뿐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이런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할까요?

비교하는 삶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어떠한 삶이든

상관없이 내 자리에 충실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사랑하며 잘 삽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