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바보 같은 이가 되어야 용서를 / 연중 제7주일[가해]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19 조회수1,260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가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참 많다. 용서는 용서받을 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청할 때 성립된단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아직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십자고상의 모습처럼, 왼뺨을 때려도 오른뺨을 때려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온전한 자기 비움의 상태일 게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조롱하는 이들에게까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신 예수님처럼 바보가 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이처럼 자기 존재를 완전히 버려야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기도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한다.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것은 다른 민족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이가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참조)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느님의 언어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갖추라신다. 속물근성이 가득한 내 모습과 늘 바퀴가 빠진 존재 같은 내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할 수가?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될 수가 있다. 믿음 안에 살면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에.

 

그런데 그 믿음이란 게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찾고 꾀 뿌리는 세상을 살기에. 우리는 줄곧 내가 이룬 성공, 내 능력에 대한 자랑과 내가 아는 좋은 인맥이 나를 성공시켜 줄 것이란 헛된 희망을 갖는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공감이 되는 시대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결국 하느님의 거룩함과 완전함의 방식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걸림돌 투성이다. 하지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 자비는, 하느님 방식으로 사랑해 본 이만 맛볼 수 있는 거룩함과 완전함이 아닐까!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놀랍기 그지없는 아찔한 말씀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라며 반문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거룩하라.’라는 명령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로 요약되는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여기서 거룩함이란 우리에게 멀리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도달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이렇게 완전해지는 것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신다. 이로써 이웃 사랑의 명령은 더 넓게 확장될 게다. 결국 완전함이란 흠 없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기준과도 바꿀 수 없는, 오직 주님께서 손수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생명의 길이 될게다.

 

대개의 경우, 성당에 들어서면 정면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는 침묵 속에 계신 예수님 고상이 온통 손과 발이 못에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누군가가 와서 뺨을 때리고 조롱을 해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이것이 성당마다 십자고상이 걸려 있는 이유이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상처 받으신 하느님께서 저렇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께서 일러 주신 용서의 마음을 헤아릴 때, 상처 난 우리 마음에 새살이 돋고 그분처럼 왼뺨도, 오른뺨도 내어 주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할 수가 있을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태그 사랑,원수,이웃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