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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3."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03 조회수1,200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태 9,14-15(재의예식 후 금)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참된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먼저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합니다.

 

그러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끄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밝혀줍니다.참다운 단식의 모습은 오히려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단식이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곧 깨끗한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에 유대인들은 본래의 그 정신은 잃어버리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이 단식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풍조는 예수님의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복음>에서 단식을 앞세우던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께 따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사실,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인 마태오 복음 6장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동시에 이제는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의 단식’이 아닌 ‘사랑의 단식’을 제시합니다. 곧 이제는 단식으로서 속죄하고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분은 예수님 당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해 주시기 때문에 속죄를 위한 단식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감사의 단식’,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써의 단식이 필요할 뿐입니다. 바로 ‘사랑의 단식’이야말로 새로운 단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사실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주십니다.

 

<첫째> 이유는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시에 예수님 당신께서는 다름 아닌 바로 신랑이심을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곧 당신이 바로 종말에 오실 신랑(요묵 19,6-9)이자 메시아이심을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 곳곳에서도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이사 54,5-6; 62,4-5; 호세 2,16-20).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불렀으며(요한 3,29), 예수님께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셨고(마태 22,2), 사도 바오로도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2고린 11,2; 에페 5,23-32).곧 예수님께서는 바로 제자들의 신랑이십니다.

 

이제 신랑과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는 달리 단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단식이 필요합니다. 단지 그 의미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둘째> 이유에서 그것을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이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해주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곧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를 계시해주십니다.

 

동시에 이제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이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의미의 단식입니다.

 

결국, 단식은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이 사람을 살리는 단식입니다.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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