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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3.0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08 조회수1,811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7년 3월 8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요나 3,1-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복음 루카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

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자신이 아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분의 어렸을 때 꿈은

목수가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만드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고 그래서 커서 훌륭한

목수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그런데 뜻밖의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글쎄 심한 소아마비를 앓게 되어서

한쪽 팔은 완전히 못 쓰는 처지가

되었고 다리도 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육체로 일하는 목수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 분은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꿈을

이룰 수가 없다면서 포기의

삶을 살았을까요?

또는 절망에 빠져서 신세

한탄에 빠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분께서

그 뒤 자신의 꿈을

 새롭게 세웠습니다.

즉, 열심히 공부를 해서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고,

실제로 지금 현재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셨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어떤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큰 실망과 함께

그 자리에서 도망만 치려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삶이

주어지는 소중한 때라고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채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주도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바로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미래이든

나쁜 미래이든 상관없이 주님께

맡긴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나는 그 뜻과 달리

자신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아시리아의

니네베 사람들이

멸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 해방을

 맞이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들의

멸망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과 다른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싫어서

도망쳤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요나의 모습을 따를 때가 참으로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자신의 뜻과 다름에

 불평불만을 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결국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른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그 큰 도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를 해서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어떻게든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분명히 내 안에서 새로운
표징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서 미래를

함부로 결정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내 안에서 드러날 새로운 표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불가능할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오후를

아침처럼 살 수 없다.

아침에 위대했던 것들이

밤에는 보잘 것 없어지고

아침에 진실이던 것이

밤에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칼 융)

이스라엘 요빠의 고래상.

고래가 요나를 내뱉어서

내린 곳이 요빠라고 합니다.

"기도에 대해..."

예전에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자신의 본당 신부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우리 본당 신부님은

 도무지 기도를 하지 않아요.

미사 전에 성당에 잠깐 앉아

있는 것이 다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신부님이 맞습니까?”
물론 성경을 보면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곧 24시간 내내

성당이나 성체조배실에 앉아서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본당신부님께서는

하루를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단순히 성당에 머물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형제님께서 자신의

아내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내와 언제나

함께 하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아내와 언제나

함께 하는 남편의

모습이 바람직합니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말하는 분도 계시겠죠.

그런데 아내와 함께 있기

위해서 밖에 나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쫄쫄

굶는데도 아내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제 어떨까요?

바람직한 모습일까요?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루 전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분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를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루 전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요즘에는 보기 힘든 옛날 골목.

그래서일까요?

더 정감이 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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