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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3.1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10 조회수1,500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7년 3월 10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에제 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

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복음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 고소고발 건수는

 엄청나다고 합니다.

보통 한해 평균 50만 건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큰 문제는

무고한 명예훼손,

모욕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혐의가 입증되어서

기소로 이어지는 비율은 전체의

3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하네요.

이는 곧 수사기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고소고발의

남용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소고발 자가

많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네가 잘못한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상대방만 잘못한 것일까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화해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마치 자기 체면이

크게 훼손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길에서

서로 부딪쳤을 때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뭐야?’라는

 표정으로 째려볼 때가

많다고 하지요.

 이렇게 째려보았을 때의

결과는 어떨까요?

싸움이 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얼른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면, 상대방 역시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식으로 사과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째려보는 것이 이득일까요?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화해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이득일까요?
저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커다란 후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친구를 향해서

 “용서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었습니다.

왜 이 말이 큰 후회가 될 수밖에

없냐면, 이 말을 내뱉고서

얼마 뒤에 이 친구가 사고로

주님 곁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싸웠고,

또 함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상처까지 주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다짐하게 되었지요.
‘무조건 화해하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의로움에 능가하는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에 있습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용서를 청해야

하는 용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 진정한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발적인

 용서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이고,

이 사랑의 마음이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되어 있지요.

주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먼저

화해를 청했을 때에

마지못해 용서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해서 함께한 게 아니야.

더 사랑하려고 함께하는 거야.

(영화 ‘업’중에서)

어제 원당동 성당으로 강의다녀왔습니다.

초대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소중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

(‘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떤 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그루는 키도 크고 나뭇잎도

무성했지만 그 옆에 있는 나무는

키도 작고 가지도 나약해서

불평이 많았습니다.
“저 키가 큰 나무 때문에

햇빛을 못 받아서

나는 자라지 않는 거야.”
“저 나무가 없었다면

훌륭히 자랄 수 있을 텐데.”
“저 나무는

키만 크지 쓸모도 없고

 나에게 피해만 주는군!”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작은 나무는 나무꾼에게

큰 나무를 도끼로 찍어

가져가 달라고 했습니다.

큰 나무가 나무꾼의

도끼에 찍혀 넘어지자,

작은 나무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제 멋지게 자랄 수

있겠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작은 나무가 쓰러져버렸습니다.

그늘이 되어 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큰 나무가 없어지자

뜨거운 햇볕과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한 작은 나무는

그만 힘없이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모르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소중함보다는 내게 해를

주고 있다면서 부정적인 판단을

가지고 대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잘못된 판단들이

 결국 내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어제 강의를 다녀온 성당 마당.

특이하게 미니 축구장이 있었어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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