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낮은 이와 함께하는 마음을 잃는다면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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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7-03-14 | 조회수1,12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명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필요 이상 소유하려는 게 심리이다. 그리고 관심 받으려면 더 많이 치장해야만 된단다. 내적으로 비어 있는 이일수록 이렇게 늘 남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누구나가 다 자신의 자리가 분명히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이가 되라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자리가 높아지면 웬만한 이는 착각을 한다. 대단한 이가 된 줄로 여긴다. 사람은 그대로이고 자리만 높아진데 그걸 잊어버린다. 그래서 고갤 숙이려 하지 않는다. 점차 마음의 고개도 숙이지 않고 뻣뻣한 이로 바뀐다나. 알맹이 없는 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이가 많을수록 그야말로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채운다면 결국은 공동체에서도 그리 오래 지탱하지를 못한다. 남을 위해 살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덜 받아 몸도 더욱 건강해지리라. 그리고 조건 없이 봉사하는 이들은 보는 이에게도 좋다. 남을 위한 봉사지만, 기쁨과 보람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일 게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나 지향하는 목표인 높은 지위나 명예는 때로는 삶의 자극제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정당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에 따른 것이어야 할 게다. 갈수록 자살이 속출하는 ‘죽음의 문화가 확산’되고 부자와 권력을 지닌 이들이 자기 것만 챙기려 다른 이를 짓밟고 무시한다.
율법의 근본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다. 그 바탕에서 주님을 흠숭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생명, 재산, 명예 등을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살도록 도와주려는 데 있다. 부당한 억압과 멍에로부터 해방하려는 것이리라. 따라서 과시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때만이 하느님 뜻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세속성보다 교회의 세속화가 때로는 더 두렵고 무섭단다. 세상 것은 그래도 솔직하기에.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우승하려하거나 정치인이 선거에서 당선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이 교회에서 세속의 가치를 얻으려면, 물고기가 달리기를 하거나 소금이 단맛 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가 않을 게다. 이처럼 거룩한 것이 부패하면, 더욱 더 고약한 악취만 풍기리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상당히 경계하라신다. 그것이 자신을 높이려고 다른 이들을 얕잡는 오만한 마음과 한통속임을 우리도 발견한다. 위선과 오만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자기를 낮추는 자세이다. 이러한 겸손이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덕목이다. 사실 겸손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이와 한마음이 되어 그들과 진정한 친교를 나눌 수 있는 통로이다. 겸손은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공정을 추구하는 예언자적 삶의 본질을 이룬다. 오늘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작은 이’들과 함께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잃는다면, 예수님의 질책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을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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