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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49,8-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29 조회수1,299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49,8-15)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이사야서 49장 1~7절주님의 종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의 종에게 주신 성취 및 영광과 승리를 약속하는 두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였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47장 8~13절까지는 주님의 종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행할 사명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 49장 1~7절 단락에서 주님의 종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만 행할 수 있는데 반해서 본 단락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는 신약의 메시야로만 국한되지 않고 구약의 역사적 인물까지 포함하는 다중성을 지니고 있다. 

 

즉 여기에서 주님께서 '너'라고 호칭하는 인물은 궁극적으로는 신약의 예수님을 지칭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바빌론 포로 유배 생활에서 해방시키는 키루스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에 해당하는 원문은 '뻬에트 라촌 아니티카'(beeth ratson anithika; in the time of my favor I will answer you)이다. 여기서 쓰여진 동사 '아니티카'(anithika)는 완료형인데, 그 일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강조하는 예언적 완료형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가 본절의 내용 중 일부를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6,2)라고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해서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은혜의 때'에 해당하는 '에트 라촌'(eth ratson)문자적으로 '호의로 받아들이는 때','열납의 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혜'라는 뜻으로 번역된 '라촌'(ratson; acceptable)원래 '기쁘게 받아들이다'는 을 가지고 있는 '라차'(ratsah)에서 유래한 명사인 것이다. 이 단어는 특히 레위기에서 백성들이 바치는 희생 제물을 주님께서 호의로 기쁘시게 받아들이신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레위1,3; 19,5; 22,19.20.21.29; 23,11). 

 

여기서 '호의로 받아들이는 때'는 메시야가 십자가상에서 죽어 하느님 대전에 완전한 제사를 바침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때를 의미함과 동시에, 그 결과로 인해 수많은 죄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때 그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때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하느님과 인간은 원수의 관계였고, 그들 사이에는 막힌 장벽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로마5,10; 에페2,13-15). 그러나 메시야가 죄인들을 대신해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는 그 원수되었던 자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화해하게 되었다(로마5,1). 

 

어떤 학자는 '은혜의 때'가 구약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50년마다 한 번씩 있었던 희년과 관련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희년의 특징은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고, 빚을 갚지 못해 잃었던 상속 재산(기업)을 되찾아 주는 기쁨의 때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도 고려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구원사적 측면에서 진정한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 오시는 구원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한편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에 해당하는 '아니티카'(anithika)의 원형 '아나'(anah)는 본래 '큰 소리로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이 단어는 주님께서 당신의 종 메시야와 긴밀히 상호 교류를 하면서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메시야는 주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입어 하느님의 간택한 백성들을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생명과 구원을 얻게 하는 사업을 맡게 될 것이다.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본문은 앞 문장과 같은 의미를 전하는 동의적 대구를 이루는 문장이다. 여기서 '구원의 날에'에 해당하는 '우베욤 예슈아'(ubeyom yeshuah; and in the day of salvation)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예슈아'(yeshuah; salvation)는 메시야의 이름인 '예수'의 히브리어 어근이기도 하다(마태1,21). 그런 측면에서 '구원의 날'은 '예수의 날'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져오는 날에는 비단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과거 하느님의 은혜에서 소외되었던 많은 이방 민족들까지도 무상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도와서 사명을 완벽하게 감당하게 하신다.

 

그리고 본문에서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에 해당하는 '아자르티카'(azarthika; I will help you)연약한 자를 주위에서 둘러싸 힘있게 돕는 것을 의미하는 어근 '아자르'(azar)의 완료 시제이다. 여기서 완료 시제는 과거에 이미 발생한 사건을 나타내는 역사적 완료가 아니고, 현재 문맥은 아직 발생하지 않는 미래의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 시제를 쓰는 이유는, 그 사건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서 완전히 정해져서, 비록 아직 발생하지 않는 일이지만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확실하기에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로 쓰인 것이다.

 

 

http://club.catholic.or.kr/dydtjdhktkfkd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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