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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일/라자로야,이리 나와라/고준석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01 조회수1,648 추천수2 반대(0) 신고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45)

★ 말씀의 초대 ★


오늘 복음은 여러 대목에서 우리 각자의 인생살이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신앙인의 관점에서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가끔 떠오르는 것이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소설 『죄와 벌』입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와 창녀 소냐의 만남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잘못된 철학과 자격지심, 오만함이 결부된 악의 포로입니다. 그러기에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하고도 그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안과 자신 안에서 조금씩 싹트는 죄의식을 부정하는 자신의 철학에 대한 의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지탱해 온 그의 세계관은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젊은 여인 소냐에게 감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비록 생활고 때문에 몸을 팔아야 하는 가련한 신세이지만 순수한 믿음과 영혼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소냐를 찾아간 주인공이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에서 그의 변화가 잘 드러납니다. "나는 당신에게 절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요." 그리고 그는 소냐의 서랍장 위에 있는 낡은 『신약 성경』 한 권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갑자기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청합니다. 잠시 주저하던 소냐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요한 복음서의 대목을 천천히 읽어 줍니다.

작가는 여러 면에 걸쳐 이 성경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말씀을 읽는 순결한 '매춘부'와 말씀을 듣는 비참한 '살인자'에게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놀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냐처럼 무겁디무거운 인생의 짐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무덤에 갇힌 것 같은 신세이든, 라스콜니코프처럼 자신의 아집과 악행으로 스스로를 영적으로 죽이고 무덤 속에 웅크리고 있는 신세이든, 그것의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시는 예수님의 이 외침은 바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 복음 묵상 ★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가 이 삶의 여정을 마치고 내려야 할 종착역은 ‘영원한 삶’이던지 아니면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합니다. 영원한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수없이 들어왔습니다.한마디로 복음적으로 사는 삶입니다. 복음적으로 산다는 것은 세례를 받고 안받고의 문제가 아니라,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참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된 이들은 유리합니다.하지만 알고도 그렇게 못사는 처지라면, 차라리 모르고 잘못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삶을 마감할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살아온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복음적인 삶의 실천여부에 의해서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이 갈리는 것이라 한다면,결국 삶에 대한 선택권은 우리 각자에게 있음을 뜻합니다.즉, 잘 살고 못 살고는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동굴 속에 있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의 시신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복음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어쩌면 라자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우리 각자의 삶이 뒤틀리고 어긋나서 어둠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이라 한다면 결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께서는 애타게 ‘라자로’를 부르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죽음의 악취가 가득 찬 무덤에서 일어나 당신께서 계신 곳으로 나오라고 말입니다.분명 이 부르심은 지나가고 말 이 삶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안타까운 그분의 음성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유혹과 죄 안에서 버둥거리고 있을 때, 항상 우리를 향해 그분께서는 외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라자로의 누이 마르타도 말합니다. "주님,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니까 어서 나오라 하십니다.“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이사야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유한한 선택입니다.선택으로 이루어진 삶이지만, 그 선택에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끝을 위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저 쓸모 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25,30)


[말씀자료:-김 대열 신부-편집:원 근식요아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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