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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치기신부님이 살레시안 묵상]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공감!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02 조회수1,893 추천수7 반대(0) 신고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공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를 보다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둥지로 만들기 위해 정말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대방이 안고 살아가는 상처와 고통, 슬픔과 나약함에 대한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옆 사람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높은 시련의 파도와 맞서느라 지금 죽을 지경인데, 바로 그 옆에서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희희낙락하며 웃고 지낸다면, 그것은 동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매너가 크게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쪽같은 자식을 잃고 저리 슬피 울고 있는데, 셀 수도 없이 많은 안타깝고 초조한 날들이 흘러감에도 시신조차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남의 가슴에 대못박는 소리 하고 있다면 어찌 그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이 가슴 아픈 시대, 더 많은 공감능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공감이란 그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공감이란 한 인간이 다른 동료 인간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입니다.

 

 

공감이란 슬퍼하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일입니다. 공감이란 그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공감이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선물입니다. 공감이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명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 옆에서 같이 슬퍼하셨습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 옆에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철저하게도 인간과 공감하셨습니다.

 

 

절친 라자로의 죽음, 오빠를 잃고 슬퍼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눈물 앞에 예수님께서도 따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복음 1133~36)

 

 

광대무변한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세상만사를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한 인간의 죽음과 눈물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셨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으십니까?

 

 

라자로 상가를 방문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실체를 명명백백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작은 고통에 공감하시며 그것을 못견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내 작은 슬픔과 하소연 앞에서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하느님이십니다.

 

 

누군가의 큰 슬픔 앞에 같이 눈물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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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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