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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4월 7일 사순5주간 금요일 독서 (예레20,10-1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06 조회수2,70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년 4월 7일 금요일

 

 

 

사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10) 

 

마고르 미싸빕(magor misabip)의 뜻을 알아야 한다. '마고르'(magor)는 '두려워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꾸르'(gur)에서 유래한 명사로 '공포', '두려움'을 뜻한다. '미싸빕'(misabip)은 '주변', '사방'을 뜻하는 명사 '싸비브'(sabib)에 전치사 '민'(min)이 결합된 형태로 '사방으로부터', '주변으로부터' 뜻이다. 따라서 '마고르 미싸빕' '사방으로부터의 공포' 뜻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시편 31장 14절을 빼놓고는, 모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편 31장 14절에서 예레미야가 전용해서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녕 저는 많은 이들의 비방을 듣습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옵니다.(마고르 미싸빕 ; magor misabip).  저를 거슬러 그들이 함께 모의하여  제 목숨 빼앗을 계교를 꾸밉니다." (시편 31장 14절) 

 

다윗의 애가인 시편 31장 14절에서 시작된 이 표현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면초가의 매우 곤란한 처지와 상황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 말은 원래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했던 주님의 집(성전) 총감독인 파스후르 사제에게 예레미야가 한 말이었다.(예레20,1-6참조)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파스후르가 아니라 마고르 미싸빕이라 부르실 것이오."(예레20,3)

 

'파스후르'(pashehur)는 '비옥한'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 '푸쉬'(push)의 분사형인 '파쉬'(pash)와 '주위를 둘러서', '주변에'란 뜻을 지닌 아람어 '쎄후르'(sehur)라는 단어의 유사음을 지니고 있다. 원래는 '파스후르'가 '찢다', '조각내다'란 의미를 지닌 '파솨흐'(pashah)에서 유래한 단어로 여겨지는데, '자유' 내지는 '자유롭게 하다'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마고르 미싸빕' 즉 '사방으로부터의 공포'란  바뀌어진 이름이 들려 졌을때, 즉각적으로 '주변의 비옥함'이란 뜻의 '파쉬 쎄후르'가, '파스후르'란 이름에서 연상된다. 이는 곧 그 이름의 개명이 주는 저주와 심판의 이미지 보다 생생하게 전달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유희를 통해 예레미야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세속적 권세로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를 막으려는 '파스후르'가 '주변의 비옥함'을 누리는 삶의 자리에서 '사방의 공포'가 밀려오는 비참한 상황에 떨어지게 될 것임을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파스후르'가 '마고르 미싸빕'이라 불리어질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대적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마고르 미싸빕'이라 부르며 그를 조롱한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넘어뜨리고 해치려고 사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들었다고 하느님께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게 할 수 있는 분, 자신이 처한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10) 

자신들의 죄를 고발하는 예레미야에 대해 그의 허물을 찾아내어 맞고소하겠다는 적대자들의 위협이다. 지금 적대자들은 예레미야를 참 예언자가 아니라 거짓 예언자라고 단정하고 그를 참소하며 깎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10) 

'가까운 친구들마저'에 해당하는 '에노쉬 쉘로미'(enosh shelomi)는 '내 평화의 사람', '내게 평안을 기원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아주 가까운 친구' 가리킨다.(시편41,10) '제가 쓰러지기만' 해당하는 '찰르이'(tsali)는 '절뚝거림', '넘어짐'(시편38,18)을 뜻하는 '첼라으'(tsela)에 1인칭 대명사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평소에 자신의 평화를 빌어주던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자신의 넘어짐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는 이 고백은 예레미야가 얼마나 고독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격려도 위로도 없이 예언직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친한 벗들도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를(실족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배신했다는 뉘앙스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 

예레미야에게 원수를 갚고자 하는 그 적대자들이 그를 속여서 이기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20장 7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주 하느님께 완전히 졌음을 선언했기 때문이다.(예레20,9)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꾀셨고, 예레미야는 그 꾐에 넘어갔다.(예레20,7)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이기셨고,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사로잡힌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리라.'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20,9)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그 적대자들은 결코 예레미야를 유혹할 수도, 이길수도 없게 된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다섯번째 고백의 전반부에서(예레20,7-10) 하느님께 불평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승리를 암시하는 복선을  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본절 이하부터 11-13절에서는 예레미야 자신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언한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2)

앞에 11절에서 자신과 동행하시고 지켜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적대자(원수)가 패망하고 자신이 승리할 것이란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되었다. 이제 12절과 13절에서는 적대자에 대한 복수를 간구하고, 이것의 실현을 통한 구원을 확신하는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된다. 

예레미야 17장 10절에는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일에 따라, 제 행실에 결과에 따라 갚는다." 라고 소개하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각 그의 행실대로 보상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는 특별히 '의인(의로운 이) 곧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그러한 주님의 보살피심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절과 병행 구절인 예레미야 11장 20절의 표현을 감안할 때, 실제로 그 적대자들의 마음까지도 주님께서 꿰뚫고 계심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본절은 사실상 예레미야 11장 20절의 반복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꿰뚫어 보심의 대상을 '의인'인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제 곁에 계시니'(11절)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특별히 주 하느님과 예레미야 자신과의 관계성에 촛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심장(마음)과 속(폐부)를 보셨다. 다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견딜 수 없었던(9절참조) 예레미야의 마음을 보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실 것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것이 악인들의 속(중심)까지 살피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패망을 당하게 되는 주님의 복수를 겪게 될 것이다. '복수', '보복'을 뜻하는 '네카마'(neqamah)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복수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종종 인간은 복수의 이차적 원인이고, 반면에 하느님께서 그 일차 원인자로 계신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에돔에게 원수를 갚겠다. 내 분노와 내 화에 따라 에돔에게 보복하겠다. 그러면 그들이 나의 복수를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20,14) 

"내가 번뜩이는 칼을 갈아 내 손으로 재판을 주관할 때 나의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되갚으리라."(신명32,41) 

 

본문의 복수의 요청은 예레미야 개인의 원한에 찬 복수의 요청이 아니다. 이는 하느님께 범죄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신실한 예언자로서의 기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복수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신께서 ...복수하시는 것을'(주님께서 ...보복하심을)로 번역된 '니크마테카' (niqmatheka)는 '네카마'에 2인칭 남성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 '당신의 복수'란 뜻이다. 이처럼 '나의 복수'가 아니라 '당신의 복수'라고 예레미야는 언급함으로 하느님의 공의(정의)에 호소하고 있다.


 

 

26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3,26-30)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요한10,40-41) 

 

 

요한복음에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의 증언이후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들을통하여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신분으로 믿게 되는 것이 10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출발점인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지요.

요게 요한 복음사가의 확인 도장은 아닐넌지요? ㅎㅎㅎ

이제 11장이후 부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오늘 복음까지 보시면서 우리들의 신앙이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나 중심의 신앙은 우상 그 자체입니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탈출20,3-4)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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