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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411 - 성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김효경 다윗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11 조회수3,730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7
04 11 () 가해 성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이사야서 49,1-6
요한복음 13,21-33.36-38


김효경 다윗 신부님


<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오리까? >


오늘 복음 말씀은 최후의 만찬 식사 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를 감동하게 만드는 말씀은 그렇게 배반할 제자들을 두고서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요한 13, 33)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이 뭐가 예뻐서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라고 부르셨는지 그리고 나는 나를 배반할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나의 형제여 자매들이여’라고 부를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면서 가르치신 가르침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랑과 용서이심을 그분의 말씀과 행동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우리 교회는 그분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과 용서를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랑과 용서 보다는 정의와 심판을 강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 역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그러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녀로서의 가장 큰 죄악은 그분을 배반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보다 큰 죄악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렇게도 믿고 의지했던 으뜸가는 제자인 바로 그 베드로가 그분을 배반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다른 제자들 역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비겁하게 도망을 갔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전달자들인 사도들은 어쩌면 최초의 배교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3번이나 배교를 했던 것입니다. 믿고 의지했던 만큼 배신감이 더 큰 것이 우리의 마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는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주님 앞에서 누가 감히 죄 없다고 그러겠습니까? 성서는 이야기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인물일수록 성서는 그들의 추악한 죄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에 몸 붙여 살려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름다운 부인의 남편이라고 하면 자신을 죽일 것 같으니 부인더러 누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 때문에 자기 부인조차 지키지 못하는 이런 비겁한 남편이 어떻게 우리의 조상이 되겠습니까?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어떠합니까? 백성들을 약속된 땅으로 그리고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하는 본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대들다가 그는 결국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정녕 우리가 따라야 하는 영도자인지 의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칭송을 받던 다윗왕은 어떻습니까? 그는 유부녀 바쎄바를 얻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는 파렴치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현행 교회법에 의하면 범죄장애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방인 선교의 사도라고 불리는 바오로는 누구 못지않게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하던 과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살해에 가담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그가 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으뜸가는 사도이고 첫 번째 교황이 된 인물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던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는 세 번이나 배교를 했었던 신앙인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배교를 한 그가 신부도 주교도 아닌 교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줄 알면서 그에게 주님께서는 믿음과 신뢰를 보여 주셨습니다. 배반할 줄 미리 아셨지만 이미 주님께서는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성서는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 오리까?”라고 말입니다. 누가 주님 앞에 죄 없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신만 용서가 필요하고 이웃은 용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님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도 용서하지 못할 죄악인지.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사랑과 용서를 이제는 이웃들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겠습니다.


김효경 다윗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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