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0415 - 가해 부활 성야 복음 묵상 -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15 조회수4,043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7
04 15 () 가해 부활 성야 복음 묵상



1독서 창세기 1,1-2,2
2독서 창세기 22,1-18
3독서 탈출기 14,15-15,1
4독서 이사야서 54,5-14
5독서 이사야서 55,1-11
6독서 바룩서 3,9-15.32-4,4
7독서 에제키엘서 36,16-17.18-28
   간 로마서 6,3-11
   마태오복음 28,1-10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주님의 부활 >


2,000
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역사와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으시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와 보람, 기쁨과 희망, 용기를 선사하셨다.

인류역사 안에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든지, 죽은 이를 환시 중에 보았다거나 죽은 이가 꿈에 나타났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성경 안에서도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켰다거나(1열왕 4,8이하), 엘리사 예언자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2열왕 4.87이하),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백인대장의 하인 및 죽은 라자로 등을 소생시켰다는 이야기를 볼 수가 있다. 또한 사무엘 상권을 보면 블레셋 군과 대적한 사울이 겁에 질려 엔도르에 있는 무당을 찾아가 사무엘의 혼백을 불러 이야기를 한 대목도 있으며(1사무 28,1이하), 꿈이나 환시를 통해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체험 하거나 죽은 이를 만나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소생도 아니고 꿈이나 환시 중에서의 체험도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증오하고 반대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 살로메, 다른 마리아 등등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갔으나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천사들을 만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녀들은 무서움 속에서 무덤을 나와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가는 도중에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침통한 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연스럽게 접근하셔서 말씀을 건네시고,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시며, 함께 빵을 나누시다가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그들에게서 사라지시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꼭꼭 닫다 걸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를 주시고,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에게 빛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사울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최고의 복음 선포자로 변하게 하신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빛나는 모습으로, 때로는 닫힌 문을 통과하시며, 예루살렘과 동시에 갈릴레아에서도 나타나시는 등 독특한 방법으로 발현하신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체험한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고 소리쳤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기도 했다. 사도 토마 같은 이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대어본 후에서야 믿을 정도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고, 당신의 손발을 보여 주시기도 하시며 유령과 다르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의 소생도 아니고, 꿈이나 환시 속에서의 체험도 아니며, 혼백이나 유령의 형태와도 달랐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방식이나 장소도 각기 달랐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께 필요한 사람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다.

유령 같으면서도 유령이 아니고, 죽었던 이의 소생 같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며, 인류 역사 안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변화된 모습,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사건이었기에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각기 다른 표현 방법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체험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그를 체험한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게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쳤고, 예수님의 으뜸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맹세까지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을 때에는 반대파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후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들은 이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령을 받아서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고(사도 2,4) 수많은 군중 앞에 대담하게 나서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사도 2,36)라고 예수님을 선포하는 용감한 사도가 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에는 기적을 행하지 못하여 예수님께로부터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 그들은 앉은뱅이를 고치기도 하고(사도 32.1이하), 8년 동안이나 중풍 병에 누워있던 애네아를 치유하고(9.32이하) 여신도 도르가를 죽음에서 소생시키기도 한다(9,36이하). 그들은 박해를 당하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가시로 몸을 찌르는 것 같은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전교 여행을 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따르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 그가 필요로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모습의 삶, 변화된 삶을 살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탄생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평화와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며, 희망과 용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2,000
년 전 제자들을 변화시키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도 새로운 변화와 삶을 주시는 모습으로 함께 계신다. 다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변화시키셨듯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를 변화시키시어 새사람이 되게끔 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삶에로의 변화를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2,000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해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긴 의식을 통하여 당시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며 기도하고 있지만, 우리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서의 변화된 삶을 보이지 못하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악습과 탐욕과 교만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안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지 못하고 사랑과 용서가 자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 안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존재양식으로의 변화요, 그 변화를 체험한 제자들이 새로운 삶을 살았듯이 오늘 이 밤을 보내는 우리도 먼저 변화된 새 삶을 살아야 하고 나아가 온 세상 사람들이 또한 새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가끔 신문지상에 가슴 아프고 끔찍한 사건들이 적지 않게 보도되고 있다. 초등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어른들까지, 많은 이들이 남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돈 몇 푼 때문에 같은 반 친구를 여럿이 폭행하거나 죽이고도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이들, 강도짓이나 성폭력을 일삼은 10대 가정 파괴범, 인신매매와 어린이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지상을 통하여 가끔씩 접하게 된다. 사회가 공업화, 상업화, 물질화 되어감에 따라서 인간성도 점차 상실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바로 이 시대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인간성 회복의 모습으로, 남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인간성의 상실이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신문에 보도된 한 토막의 기사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실임을 생각하고, 먼저 우리 안에서 사랑의 마음, 남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우러나도록, 내 삶을 변화시키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내 안에서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업신여기는 마음과, 나만이 최고라는 교만과 자만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오늘 이 부활의 밤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 안에 희망과 용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실의와 좌절에 빠졌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용기와 희망이 넘쳐서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도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오늘 이 부활의 밤은 우리 마음속에 희망과 용기를, 빛을 던져주는 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돈 때문에, 시험 성적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마약 중독자가 한국 안에서도 50만 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고난에 대처하지 못하고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삶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피하려 하는 데서 기인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을 똑바로 보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으로, 희망과 극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좌절과 절망에 처해졌지만 다시 부활하시는 영광과 기쁨을 얻으셨듯이, 오늘 이 부활의 밤은 우리 안에서 기쁨과 희망의 밤, 용기의 밤으로 다가와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가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넘쳐흘러서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인간성 회복의 모습으로,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모습으로 늘 함께 계시고,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이 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신다.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평화를 주신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들, 힘들고 짜증스럽게 하는 것들, 고통스럽고 괴롭게 하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깊은 평화를 주신다. 그리고 그 평화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이웃 모두에게 인간성의 회복과 희망과 용기의 모습으로 전파되신다.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