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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4.2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27 조회수4,112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7년 4월 27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 5,27-33

그 무렵 경비병들이

27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복음 요한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운전을 하다보면 옆 차선의

차 앞으로 들어오겠다면서

방향지시등을

켜는 분이 계시지요.

때 약간의 속도를 늦춰서

제 앞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면 비상등 신호를 켜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러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다른 신부님의 차를 타고서

어디를 가고 있었는데

길이 꽤 막혔습니다.

바로 그때 옆 차선에 있던

차 한 대가 방향지시등을

켜고서 저희 차 앞으로

들어오겠다는 표시를 했지요.

운전을 하던 신부님께서는

속도를 늦춰서 그 차가 안전히

들어올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그런데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지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이렇게 막히는 길에서

양보를 해줬는데

고맙다는 표시는 해야

하는 것 아냐?”
그러자 운전을 하던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고마워하면 좋겠지만,

고마워하지 않으면 또 뭐 어때?”
생각해보니 고마운 마음을 갖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자유에 대해서 제가 이러쿵

저러쿵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물론 제가 큰 손해를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마움을 받지 못해서

‘손해’를 봤다고 느끼는 것과,

그 때문에 마음이

계속 흐트러지는

‘손해’를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마음이 계속

흐트러지는 ‘손해’까지

당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마음이 불편해지는 손해까지

감수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내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손해는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보상을

받는 사랑일까요?

내가 하나를 주었으면

하나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어떠한 보상을 원하지 않았으며,

또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원하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이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향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보상받으려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인정해주시고 보상해주시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마크 트웨인)

성녀 마더 데레사의 기도하는 모습.

우리도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 볼래?"

(김정용, ‘좋은생각’ 중에서)

10년 넘게 교복을 팔면서

많은 여학생을 만났다.

여학생들은 너나없이

날씬해 보이고 싶어

허리선을 줄여 달라고 했다.

한데 그러면 편히 움직일 수

없는 데다 깐깐한 선생님에게

지적당하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외모에 한창 관심 있는

시기라 여린 마음에

상처 줄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시 한 번’이란

말로 설득했다.

처음엔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래?

공부할 때 불편할 텐데.”

그러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건강을 언급하면 괜찮겠지.’

싶어 바꿔 얘기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래?

조이는 옷을 입으면

혈액 순환이 잘되지 않아

건강에 해롭고

 두뇌 회전도 힘들어.”

그래도 아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아이들을 설득하는

말을 찾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래?

이런 옷을 엄마가 좋아할까?”
엄마라는 단어만으로도

대부분 한 걸음 물러섰다.
“엄마가 싫어할까요?”
“그럼, 꽉 끼는 교복을 입으면

건강에 안 좋은 것을 아니까.

널 학교에 보내 놓고

얼마나 걱정하겠니?”
아이들은 그 말이
신경

쓰이는지 고집을 꺾었다.
“기특하네. 엄마를

배려할 줄도 알고.”
대견한 마음에 칭찬해 주자

한 아이가 말했다.
“배려가 아니라 사랑이죠.”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한 글이 아닐까 싶어서

그대로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너를 위해서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에

오히려 마음에 움직입니다.

우리도 다시 생각해보고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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