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온유와 겸손으로 법보다는 사랑을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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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7-06-19 | 조회수5,05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은 한나스의 심문 때 경비병에게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라며 뺨을 맞았다. 이때 그분은 무조건 맞기만 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이르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증거를 대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참조) 이렇게 예수님은 불의에 타협은커녕 침묵하지 않으셨다. 당당히 맞섰다. 상대방의 양 뺨을 한손으로 연속으로 치려면 손바닥과 손등을 차례로 사용해야 할 게다. 손등으로 상대를 때린다는 건 심한 모욕과 멸시까지 안긴단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이렇게 예수님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대라신다. 악의를 품는 이에게 저항하지를 말라신다. 따지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악을 극복하라는 거다. 이는 도저히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렇다. 신앙인은 매사를 폭력으로 맞대응해 해결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건, 그분처럼 다른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삶을 사는 거다. 그분께서는 온갖 모욕과 멸시를 끝내 참으시고 당신의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
실제로 많은 착한 이가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라며 자신의 화를 털어놓는다. 이것은 삶의 억울함을 인정하고 나아가 불공평함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그렇다. 우리 삶에는 억울함과 불공평은 어디에나 있다.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억울함을 당한다나. 때로는 모함 받고 가끔 이용도 당한다. 오해 땜에 멍들었던 일이 한두 번 아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였는가?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나? 아니면 ‘악쓰고 반항’하였나? 결과야 어떻든, 상처 남는 건 매한가지니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교회에서 말하는 착함은 ‘정의가 배제’된 게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억울함의 상처’가 십자가라는 것만은 인정해야 할 게다. 생각하면 가슴 떨리고 증오가 솟더라도 끌어안자. 그러면 은총이 함께하리라. 누군가가 ‘오른뺨을 치더라도’ 눈은 흘길지언정 꾹 참자. 실제로 예수님도 불의에 항거하시면서도 끝내 참으시는 용기를 보여 주셨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예수님은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택하라며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의 이 아픔이 더 이상의 고통이 되지 않으려면 ‘온유와 겸손’뿐일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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