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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3주일 2017년 7월 2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30 조회수3,963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13주일 201772

마태 10, 37-42.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예수님의 제자는 부모도 자녀도 외면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복음서는 2천 년 전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면 표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를 외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부모, 또는 하느님과 자녀를 대립시켜 놓고,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나 자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우리는 천륜(天倫)이라 부릅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사실을 전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모와 자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인연도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시선에서 새롭게 생각할 것을 권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비로소 부모와 자녀의 천륜이라는 관계가 올바르게 이해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넓은 인연(因緣)의 세계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셨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봉양(奉養)하는 것도, 자녀를 양육(養育)하는 일도, 모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에 대한 우리의 효심도, 자녀를 위한 우리의 사랑도 맹목적 애착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질 때,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주로 생각합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자녀에 대해서도,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체면을 위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생각에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 안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시야에서 부모도, 자녀도 새롭게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좁은 시야가 원하는 바를 포기하는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좁은 시야의 목숨을 잃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이라는 자각(自覺)에서 시작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존재도, 자기의 주변도, 모두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사람의 병을 고친 다음,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했소.”라고 말씀하셨다고 알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느님은 생명을 베풀고 살리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자기도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이 살리는 분이라서 자기도 살리는 노력을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살리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실천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인간 윤리의 요구에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앙의 강력한 동기(動機)가 첨가됩니다.

 

자녀 교육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한다고 하면서 흔히는 우리의 욕구와 욕심을 충족시키려 합니다. 자기가 하지 못했던 것, 혹은 자기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녀에게 강요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키우지 못하게 합니다. 경쟁하면서 많은 것을 외우는 아이들만 키우고 있습니다. 학교로, 학원으로 다니면서 지식이라는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이웃과 경쟁하는 아이들입니다. 이웃을 이해하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보면서 이웃에게 양보하는 인간의 마음은 점점 그들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점수, 좋은 대학, 많은 재물, 높은 자리를 위해 계속 경쟁해야 합니다. 아이의 두뇌가 따라 주지 못하면, 치맛바람도 좋고 촌지(寸志) 봉투도 좋습니다. 하여튼 내 자식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야수(野獸)가 그 새끼를 키우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에서 자녀를 보는 시선은 다릅니다. 이 넓은 인연 안에서 자녀를 보는 신앙인에게 자녀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특별히 맡겨주신 생명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욕구 충족을 위한 존재도 아니고, 부모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수단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삼가 키워야 하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는 분이라, 우리의 자녀도 그분의 살리는 일을 연장하여 실천하며 살도록 키워야 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최대의 보람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키워야 합니다.

 

그런 노력에는 십자가가 따릅니다.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고 자녀를 사람답게 키우려면,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이어서 복음은 또 말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좁은 시야에 보이는 자기의 현세적 삶 하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 매진하면, 부모도, 자녀도, 세상도 모두 그 참된 의미를 잃는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넓은 인연의 세계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세계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당신의 삶을 내어줌과 쏟음이라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그 내어줌과 쏟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의 세계 안에 보이는 생명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내어주고 쏟는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입니다. 나 한 사람의 목숨이 가장 소중한 이기적 인연의 세계에서는 나 자신만 생각하고, 부모도 자녀도 나 한 사람을 성취하기에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중심이신 넓은 세계 안에서 부모도 자녀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힘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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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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