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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예.’할 것은 ‘예.’하고)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02 조회수4,439 추천수0 반대(0) 신고

 

.’할 것은 .’하고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연결입니다.

수요일 복음에

이런 말이 나와요.

나는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사실 예수님은 그 당시로는

율법을 파괴한 사람으로서

죄명이 율법의 파괴자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하셨으니,

뭔가 다른 거지요?

예수님이 말하는 율법과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율법의

 개념은 다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은 네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십계명,

둘째는 모세오경,

세 번째는 모세오경 플러스

 예언자들의 가르침,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이 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이 말하는

율법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편적인 율법이 아닙니다.

원래 십계명이나 민수기 등을

보면 하느님의 가

르침에 대한 내용,

큰 줄기만을 이야기해

놓았지 어디를 보더라도

자세한 세칙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후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법학자가 있듯이,

율법학자들이 생겨났어요.

그리고 이들은 만든 세칙을

가지고 군림하기 시작합니다

권위만 있으면 되는데

권력을 휘둘렀다는 겁니다.

권위와 권력은 다른 것입니다.

권위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이러니 유대인들은 율법학자들이

정한 율법을 자기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 너흰 지키고 살아,

우리는 먹고 살기도 힘들어

하고 말지요.

율법학자보다 그야말로

 글자 하나하나 지키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도 separation,

분리된 자라는 뜻이지요.

스스로들도

 우리는 평민과 분리되어있어’,

 ‘너희는 안 지켜도

우리는 철저하게 지켜.’

십계명이 예수님시대에는

613계명으로 늘어나 세칙까지

하면 2천여 개가 넘었습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빠져나갈 곳이 없었지요.

그러니 일반 유대사람들은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득권자들이

이런 율법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지요.

예를 들면 밥을 먹을 때 우

리는 감사기도를 하고 먹지요?

그런데 율법학자들의

율법은 쉽게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손부터 씻어야하는데,

위생적으로 씻는 것이 좋지만,

그 절차가 너무 복잡했어요.

먼저 손을 벌려 동전

5개만한 조개껍질에 채운

물을 위에서 아래로 3번 흘린 후

왼쪽을 5,

오른 쪽을 5번 비빈다. 등등..

누가 만들었는가?

천지창조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는

그런 것 없었단 말이지요.

그러니 성자가 볼 때는

참 한심한 거지요.

우리 아빠 성부가 이 세상

자유롭게 살고 천국 오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십계명인데!

내가 가끔 그런 예를 들지요?

네비가 없던 시절 이사를 가서

친구에게 집들이를 한다고

 단톡을 보냅니다.

‘*******시에

우리 집에서 집들이를 한다.’

하면서 주소만 보냅니다.

그러면 그 주소 하나만

가지고 찾아가는데

고생하겠지요?

버스부터, 그 동네에 가서도

복덕방이나

동네사람들에게 물어야하고.

그런데 또 한 사람은 그 주소를

보내면서 오는 방법을

아주 자세히 곁들었다 합시다.

**번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려,

그려면 **이 보일거야.

거기 왼쪽에 있는 수퍼를 끼고

 돌아 500미터 가다보면

파란대문이 연달아

붙어있는 집이 있어.

첫 번째 파란대문에는

불독이 있으니 조심하고,

우리 집은 두 번째 파란대문이야.'

그러면 찾아가는

친구는 고마움을 느끼겠죠?

한 번에 쉽게 찾아 갈 수 있어요.

이렇게 십계명은 우리를 자유롭고

 쉽게 높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께 갈수 있게 해주어요.

이런 하느님의 권위에 찬 십계명이

 권력을 잡기위한 가르침으로

 변질을 한 거예요.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가 아닌

완성하시려다가 죄명

율법의 파괴자로 돌아가셨어요.

그렇다면 2천년이 지난 지금은

예수님이 되돌리려고 했던

그 모습으로 돌아갔을까?

아마 지금 예수님이 교회를 보시면,

 ‘내가 있을 때보다 더 하구나!’

하실 수도 있겠다.

또 예수님에 대하여 쓴 책을

예수님이 직접 한 번 읽어본 다

음에도 뭐라 하실까?

내가 읽어봐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뭔 이야기를 하는 거냐?’

구약의 이야기는 딱 3가지예요.

창조, 범죄, 재창조.

이것이 돌고 도는데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는

죄를 지어 타락을 했어요.

그런 다음 회개 하면

하느님이 재창조를 하시고.

이것이 바로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여 꼬불꼬불하더라도

앞으로 간다는 거지요.

, 그럼 우리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불합리적인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현상에

직면할 때 마다

그 불합리함 그 자체에 대해서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과연 나는 내가 법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한 적은 없는가?’

를 생각해 봐야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잣대가 있어요.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잣대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공평하기보다는 주관적이죠.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받은 상처가 다르고

받은 축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단지 늘 자기가 만든 잣대가

다른 사람의 잣대보다

정확하다고 믿고 싶을 뿐이지요.

내 마누라 잣대보다는 내 잣대가,

사고치는 신랑의 잣대보다는

내 잣대가,

박사학위 받은 내 잣대가

더 정확하다고 믿고 싶고,

주교들은 신부들의 잣대보다

본인 잣대가 더 엄숙하고

정확하다고 믿고 싶지요.

그 안 맞는 잣대로

 하느님을 재고

주변사람을 재고

본인의 인생을 재단합니다.

하지만 결국에

돌아오는 것은 상처입니다.

우리는 이 불합리한 잣대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나의잣대를 돌아봐야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잣대인지

혹시 다른 사람을 잰 적은 없는가?

우리는 살면서 억울한 적이 많죠.

주머니 속을 뒤집듯

뒤집을 수도 없고

그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하지만 이런 어둠을 대할 때

적어도 나부터라도 하느님의

잣대로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가

그리 흘러가면 동화돼요.

나 혼자 기를 써도 안돼요.

역사학자 토인비는

 세상을 이끄는 것은

소수의 창조가 이다.”라고 했어요.

역사를 올바로 이끄는 것은

다수의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소수의 사람들이란 뜻이죠.

엄밀히 말한다면

 creative minority

특별히 산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모법답안처럼 살았는데,

워낙 주위가 어둡다보니

그렇게 산 것이 뛰어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거지요.

오늘 말씀에서 뭐라고 했어요?

할 것은 하고.

내 양심으로는 해야 하는데,

분위기를 보면

할 분위기가 아니야.

‘no’해야하는데 분위기는

 . ‘하면서도 얼마나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는지..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 ‘아니오아니오

흑백논리라고 하는 것은

조금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악과 싸울 때는

절대로 중간, 양다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지요.

내가 어둠이랑 같이 살 거면

어둠의 자식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무리 어둠이

나를 잡아 끌어도

기를 쓰고 나와야지요.

백 명 중 99명이 어둠으로

쏠려가더라도

하느님 쪽으로 서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요.

세상에는 선한 조직,

집단이 있어요.

예를 들어

수녀님들이 사는 집단.

하지만 그 안에도

갈등도 어둠도 있어요.

수녀님 모두 밝고

성모님 닮은 것은 아니지요.

세상에서 선한 집단이라고

하는 곳에도 밀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라지가 안 죽는다고 해서

하느님은 없어하는 것은 아니죠.

하느님은 알고 계세요.

하지만 지금 뽑으면

밀까지 같이 뽑혀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사람을 보고

실망을 할 필요가 없어요.

하느님을 마음에 담고 살면

담대해져요. 깡다구가 생겨요

하지만 사람을 담고 살면

늘 힘들지요,

그 피 흘렸던 상처 아물만하면

믿었던 사람에게 또 상처받고.

늘 말했지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을 대상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람은 신의의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신의라는 다리가 있지만,

언제든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는 분별의 나사로

그 다리를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분별의 나사가 녹이 슬어서

 풀어지기 시작하면 신의는

무너지고 어둠밖에 안 남아요.

어떤 때는 내가 분별을

잘 못해서 상대편을

죄짓게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고백성사 때

죄 고백 후에

이밖에 알아내지..” 하지만,

예전에는 남이 나로 인해

 범한 죄가 있을 터이니

신부는 이 죄인을

도무지 벌하고 사하소서

, 내가 지혜롭지 못하고

분별치 못하여 서로간의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사이에는 엄밀히

따지면 믿음이라고 하는

큰 개념은 늘 불안정하지요.

결혼식장에 입장한 부부들이

이혼하려고 결혼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겠어요?

내 안에 있는 법이라는 것에

가시가 숭숭나있을 때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도,

또 남이 내게 다가와도 찔려요.

자기 수련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과의 싸움입니다.

성당 와서 말씀 들을 때마다

가시 잘라내고 성사 볼 때마다

잘라야합니다.

하지만 후회만 하다 보니

자르지 못하고

악순환이 되는 거지요.

오히려 어설프게 자르면

그 가시는 더 두꺼워지고

뿌리는 더 깊어져 힘들어지지요.

그리고 나중에 세월이 가면

본인 스스로도 포기하게 되지요.

할 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으로

‘No’할때 ‘No’하는 것도

예수님의 분별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20176월 느티나무카페 정모미사(6/17)

배티성지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배티성지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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