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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7.0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05 조회수3,265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7년 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제1독서 2열왕 24,18-22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18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제2독서 로마 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태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

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전에 스마트폰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 잡아보는 스마트폰은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손에 쥐고 다니는 컴퓨터였지요.

신기함에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스마트폰을 잡고서 새로운 기능을

 익히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초기화’라는

버튼을 발견했습니다.

컴퓨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종종 ‘초기화’를 하고 있었던

저였기 때문에, 스마트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이 ‘초기화’를

눌러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초기화’ 버튼을 누른 순간,

 어마어마한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휴대전화 안에 있었던

전화번호가 모두

지워졌던 것이지요.

단 몇 초 사이에 주소록에

담겨 있었던 그 많던

전화번호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때의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이제 제가 원할 때

전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저를 찾지 않는 한

연락할 수 없는 수동적인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관계가 되면서

비로소 주소록에 담겨 있었던

사람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되더군요.
사실 우리들은 능동적인

관계에 익숙해 합니다.

내가 원하는 만남만을 취하고,

원치 않으면 별 어려움 없이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한 지를 깨닫지 못하면서

내 편의대로 살아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인 관계가 되고날 때

비로소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하나하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것이지요.
주님과의 관계 역시도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대하는 능동적인

관계의 모습을 주님께

연장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원할 때에만 주님을 찾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외면을 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유를

대면서 말이지요.

이렇게 내 중심의 능동적인

관계에서는 절대로 주님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제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지요.

 1845년에 서품을 받고,

그 다음해인 1846년에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일 년 남짓의

사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순교 신앙은 한국 교회

역사의 기본 틀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삶을

사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능동적인 주님과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셨고 그래서 주님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그저 내 편의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보여주신

 순교의 모습을 따를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순교자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배교자의 모습일가요? 

삶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어떤 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기적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백세인생"

(이애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많이

 찾는 노래 1위라고 하더군요.

 바로 이애란 씨의

 ‘백세인생’이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작곡가

김종완 씨가 1995년에

작곡한 노래로 20년 전, 친

구의 아버지가 50대에

돌아가시자 자식들이 애타게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고서

좀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가사를 썼다고 하더군요.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또 넘어간다.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텐데 또 왔냐고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극락왕생

할 날을 찾고 있다 전해라
백 오십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나는 이미

극락세계 와있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아가요.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

그러나 어떻게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인천교구 선학동성당

노인대학 피정 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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