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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4주일 2017년 7월 9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07 조회수3,333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14주일 201779.

마태 11, 25-30.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실망한 제자들은 흩어져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함께 회상하면서 그분이 그들에게 남긴 말씀들을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실천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의 수는 늘어나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회상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회상한 바를 글로 남겼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네 개의 복음서들입니다. 그 기록들은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증된 사실만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여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그들이 기억해 낸 예수님의 말씀들과 하신 일이 있고, 또한 자기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깨달아 기록으로 남긴 말씀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전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기도라고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바치던 기도 내용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지혜와 슬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이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한 것은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당국은 예수님 안에 그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판단하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믿음은 모세와 더불어 시작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중심으로 발족한 유대교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율사들은 율법 준수를 절대화하고, 사제들은 제물 봉헌을 가장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기원(起源)에 있었던 믿음은 왜곡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을 절대화하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려서 된 일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그들의 지혜에서 나온 율법과 제물 봉헌을 절대화한 나머지, 그들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지혜는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하게 하였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물 봉헌은 사람이 노력하여 얻은 산물(産物)을 먼저 하느님의 시선 아래 갖다 놓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맏아들, 농사 수확의 맏물, 축산(畜産) 동물의 맏배 등, 자기들이 얻은 맏물을 먼저 하느님 앞에 가져와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봉헌된 것은 하느님이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바치면, 하느님의 시선(視線)이 그 위에 내려오고, 그때부터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이기적 인간의 시선을 교정해 줍니다. 따라서 제물 봉헌은 사람을 나눔에로 초대하고, 그 나눔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율사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가상(假想)하여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율법 조항은 많아지고, 그것을 지키지 못해 죄인이 된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사제들은 성전(聖殿)에 많이 바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많이 바치면, 하느님이 많이 주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과응보(因果應報) 관행을 동기로 삼은 것입니다. 우리의 관행을 하느님에게 연장 적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일에 슬기로운 사람들이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하느님이지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롭고, 슬기롭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슬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우리 지혜의 산물(産物)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철부지들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철부지는 어린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마르 10,14-15). 예수님은 그렇게 철부지 어린이를 하느님의 나라와 연결하여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어린이와 같이 유치한 사람이 되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의 지혜와 슬기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부모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부모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부모로부터 배워서 인간의 참다운 자유를 배웁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담긴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 곧 자비와 용서를 배워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슬기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지혜의 산물도 아니고, 우리의 슬기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길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많이 바쳐서, 많은 대가(代價)를 얻어내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그 생명이 우리의 삶 안에도 살아있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단편적으로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한 번씩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용서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지혜롭게 또 슬기롭게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수고하고 짐을 진우리들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배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벗어나는 자비의 길이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구원의 길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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