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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 미사 강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2017년 6월 29일 목요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07 조회수3,499 추천수0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news.va/en/sites/reflections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cotidie/2015/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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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17 629일 목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사도행전12,1-11

화답송 : 시편 34(33),2-3.4-5.6-7.8-9( 5ㄴ 참조)

2독서 : 티모테오 2 4,6-8.17-18

복음 : 마태오 복음 16,13-19

http://i.catholic.or.kr/missa/?missaid=8168&gomonth=2017-06-29&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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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

http://www.news.va/en/news/pope-francis-homily-for-feast-of-saints-peter-and

 

 

2017-06-29 바티칸 라디오

 

(바티칸 라디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목요일 아침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을 기념하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교황은 강론에서 오늘날 사도의 삶에서 핵심이라고 말한 세 개의 단어, 고백과 박해 그리고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 말했습니다.

 

다음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의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전문이니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전례는 우리에게 사도의 삶에서 핵심이 되는 세가지 단어를 제시해 줍니다. 고백, 박해 그리고 기도.

 

고백. 주님의 질문이 일반적인 질문에서 구체적인 질문이 될 때 베드로는 복음에서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오 복음 16, 13) 조사의 결과는 예수님께서 예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스승님께서는 결정적인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 이 때에 베드로가 홀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 살아 있는 하느님, 우리 생명의 주인 예수님을 안다는 것.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특별히 목자들인 우리들에게 이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그것은 어정쩡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우리의 삶 전체를 활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질문은 삶에 대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항목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분께서는 우리를 똑바로 보시면서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나는 누구이냐?”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아직 네 삶의 주인이냐, 네 마음의 갈망이냐, 네 희망의 이유이냐, 너의 실패하지 않는 믿음의 원천이냐?” 베드로와 함께 우리도 오늘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 삶의 선택을 다시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또한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에서 그분의 두 번째 질문으로 나아가게 해 주시기를, 말뿐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과 우리 자신의 삶 안에서 그분의 것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말뿐인 그리스도인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봅시다. 말뿐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세상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야기하고 계속 나아가는 사도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그분 예수님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으로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단순히 의견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정쩡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불 속에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그저 발헤엄을 치거나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날마다 새롭게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바오로가 한 것처럼 합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릅니다 ?가는 길의 그저 일부분이 아니라 그 바로 끝까지 말입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 자신의 길이 아니라 그분의 길을 따라 그분을 따릅니다. 그분의 길은 새 생명의 길이고 기쁨과 부활의 길입니다. 그것은 또한 십자가와 박해를 통과해 지나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두 번째 말이 나옵니다. 바로 박해.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피를 흘렸고 초대 공동체는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에 따르면 그 전체가 박해를 경험했습니다.(사도행전 12,1). 오늘도 또한 세계 각지에서 때때로 침묵 속에서 ? 때때로 공모된 침묵 속에서-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으로 무시 받고, 차별 받고 심판 받고 폭력과 심지어 죽음에까지 굴복 당합니다. 그들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방어해 줄 사람들의 편에 서 있는 정당한 중재가 없는 상태에서 빈번하게 그렇게 됩니다. 

 

여기서 나는 바오로 사도가 그의 말씀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티모테오 24,6)”에서 이미 말한 어떤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고린토 전서 2,2 참고)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인데(고린토 전서 2,2 참고) 그분께서는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분(갈라티아서 2,20입니다. 진실한 제자로서 바오로는 그렇게 스승님을 따랐고 또한 자기 자신의 생명도 내어 놓았습니다. 십자가를 떠나서는 그리스도가 없고 십자가를 떠나서는 그리스도인도 역시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선한 일을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악을 견디어 내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Augustine, Serm. 46,13), 예수님께서 하셨던 바로 그대로 말입니다. 악을 견디는 일은 단순히 인내나 체념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의 짐을 지는 것을 의미하고 그분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그 짐을 어깨에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을 견디어 내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즉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편이라는 확신에 찬 깨달음 안에서 확고히 밀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오로와 함께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고린토 후서 4,8-9)

 

악을 견디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방법과 다른 예수님 당신의 방법으로 악을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 ? 우리가 들은 대로 ? 는 자기 자신을 화관을 받을 승리자로 생각했습니다.(티모테오 2 4,8 참고) 바오로는 이렇게 씁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7). 그가 훌륭히 싸웠다고 하는 것의 핵심은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과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오로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면서 달릴 길을 달리는데그의 삶을 썼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가 지켰던 것은 오로지 한가지임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신의 건강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고백. 사랑에서 그는 시련과 치욕과 고통을 경험했는데 그것을 찾지는 않겠지만 언제나 받아 들여져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주어진 고통의 신비 안에서, 우리 자신의 나날들 가운데 박해 받고 가난해 지고 병약한 너무나 많은 우리 형제 자매들에 의해 새겨진 이 신비 안에서 예수님 십자가의 구원의 힘은 앞에서 빛납니다.

 

세 번째 단어는 기도입니다. 사도의 삶, 그것은 고백에서 비롯되어 흘러 나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게 되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기도의 삶입니다. 기도는 희망을 키우고 충실함을 높이는데 필요한 물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게 해 주고 기도는 우리가 그 보답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빛을 가져오기 때문에 어둠의 때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떠밀어 줍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고 우리가 역경을 이겨내게 도와 주는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또한 제1독서에서 이 말씀을 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사도행전 12, 5). 기도하는 교회는 보호 받으며 주님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며 사랑하시는 그분의 보살핌에 맡깁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고 지탱해 주는 힘이자 강인함이고 영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자기 만족과 고립의 치료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생명의 영이 숨쉬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 우리를 포로로 붙들고 있는 내면의 감옥은 열릴 수 없습니다.

 

복된 사도들께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마음을, 지쳤지만 기도 때문에 평화로운 마음을 얻게 해 주시기를. 끊임없이 구하고 두드리고 중재하고 주님께 맡겨야 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상황의 무게에 눌려 있기 때문에 지쳐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평화롭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위로와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기도의 스승을 두어야 하는 일은 얼마나 시급한지요. 하지만 우리가 기도의 남자와 여자, 즉 삶 전체가 기도가 되는 남자와 여자가 되려면 더욱 그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고백하는 사랑에 진실하시며 그분께서는 시련의 때에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도의 여정에 동행하며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형제 추기경들 여러분과 같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추기경 여러분들은 피를 흘림으로서 믿음을 고백했던 사도들의 사랑 안에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팔리움을 받은 사랑하는 대주교들 여러분과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주교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깨에 둘러매신 착하신 목자를 본받으며 양떼들을 위해 인생을 쓰기 위해 강인해 질 것입니다. 함께 모인 그분의 양떼를 보기를 갈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세계총대주교 파견단과 우리 사도적인 친교의 징표로 그들을 보낸 사랑하는 바르톨로메오 형제를 함께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기를.

 

(바티칸 라디오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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