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0708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08 조회수2,91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7
07 08 () 가해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창세기 27,1-5.15-29
마태오복음 9,14-17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잔치 집에 온 사람들은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단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잔치와 같은 기쁨이었다는 뜻입니다잔치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을 의미하기 위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입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은 새로운 것이어서 유대교라는 헌 옷 혹은 헌 가죽 부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단식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심신 단련 수단입니다. 유대교에서도 단식은 초기부터 중요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 40일 동안 단식했고(출애 34,28), 예언자 엘리야도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였습니다(1열왕 19,8). 예수님도 세례 받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유대인 율사였던 바오로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할 때 사흘 동안을 단식하였습니다(사도 9,9). 유대교 전통에 단식은 이렇게 중요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의 격언에 ‘유대인 같이 굶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유대인은 별나게 단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보면, 자선, 기도, 단식이 가장 중요한 유대인의 신심행위로 요약됩니다. 예수님은 그 신심행위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은 다음”(6,6), 단식할 때는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6,18)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심행위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 과시하고 우월감을 가집니다. 신심행위는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우월감을 가지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아가 정치적 독립을 잃고 정치권력이 몰락한 후부터 유대 민족을 실제로 통치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종교인들이 그 사회의 실세가 되면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은 종교 계율이었습니다. 계율을 준수하는 사람은 경건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회에서는 종교 계율의 준수여부가 주목을 받았고 우월감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당근과 채찍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근을 주고 채찍을 가해서 말을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엄하게 다스려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몰고 간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대중에게 제시한 당근은 메시아의 나라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되찾을 뿐 아니라, 세상 만방을 지배하는 강한 민족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채찍은 율법 준수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율법이 명하는 십일조와 제물 봉헌에 충실해야, 메시아의 나라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메시아의 나라를 오지 못하게 훼방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백성의 공적(公敵)으로 여겨졌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예수님을 유대교 당국이 무난하게 처형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자유스런 태도를 이스라엘이 메시아의 나라라는 당근을 얻는데 장애가 된다고 매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근과 채찍으로 농락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근을 얻기 위해 비굴하게 율법 지키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호세 6,6)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시오.(마태 9,13) 메시아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다. 보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시오.(마르 13,21)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채찍과 당근을 주는 분이 아니라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배려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배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나타납니다. 그 공동체는 예수님이 죽음을 무릅쓰고 되찾으신 자유를 알아듣고 배웁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잔치와 같이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단자로 처단 되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들도 그들의 믿음이 노출되자 유대인 집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시대 그 추방은 이스라엘 안의 공민권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역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상하며 발생한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지 않고’,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지 않는다.

새 포도주인 그리스도 신앙은 유대교라는 낡은 가죽부대를 떠나 새 가죽부대, 곧 새로운 실천과 새로운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신앙인들의 비애와 새로운 각오가 담긴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연 자유로운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지키고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우리의 신앙이라면, 우리는 또 당근과 채찍을 상상하면서 자유를 잃고 비굴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사람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몸짓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살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비롭고 용서할 때,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자유는 인간이 실현해야 하는 큰 과제입니다. 당근도 채찍도 가상하지 않고, 하느님을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할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새 포도주입니다.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하는 우리 자신이고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기쁘게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