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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15 조회수3,985 추천수0 반대(0) 신고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찬미예수님

 지난주에는 사제피정이 있었어요.

참 좋은 피정을 하고 왔습니다.

원로신부님께서 오시어

강의해주셨는데, 그 중 마음에

와 닿았던 말을 소개해드립니다.

“우리가 미사 때 영하는 성체는

나자렛 예수를 영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하는 것이다.”

요즘 녹음해온 것을 다시

들으면서 정리하고 있는데,

나중에 다시 전할 기회가

있으면 전하겠습니다.

 오늘은 지난 목요일 축일을

지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에

대한 강론을 하려고합니다.

왜 교회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사도의 축일을

한 날로 정했을까요?

한사람은 초대교회의 기둥이고

한사람은 주춧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사도를 주춧돌이라

한다면 바오로 사도는

기둥이지요.

한국교회의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신부님을 비교하면

비슷해요.

김대건 신부님을

주춧돌이라고 하면,

최양업신부님은 그 위에

기둥을 올린 어른이시죠.

그 위의 지붕을 얹는 일에 나는

기왓장 한두 장은 얹었을까?

기둥만 있다고 해서 집이

만들어질 수도 없는 것이고,

주춧돌만 있다고 해서

집이 완성될 수 없듯이,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높고 낮음도 없이

한 교회를 떠받치는 큰 기둥이요

큰 주춧돌이기에 두 사도의

축일을 따로 정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의 인간적인

신분의 차이는 컸습니다.

베드로는 어부,

비린내 나는 어부였어요.

반면 바오로는 당대 율법의

대가 가말리엘의 수제자이자,

12지파의 우수한 귀족이었어요.

가문으로 따지면 차이가 컸지만,

예수님에게 사로잡히고 난 후에

두 사람은 높고 낮음이 없이

교회의 주춧돌과 기둥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 사도

이야기를 해봅시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12제자 가운데 예수님에게

질문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네, 베드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 18,21)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마태 19,27)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1) 등등

12사도 가운데, 어쩌면

다른 11사도의 마음을

읽고 대표로 열심히

물었던 것 같아요.

 두 번째 질문,

12제자 중 예수님에게

가장 혼이 많이 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베드로죠? 언제입니까?

첫 수난예고 후에 베드로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 외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꾸중을 여러 번 듣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제자 중

장 허풍이 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베드로 맞아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 26,33)

그랬던 이 분 입술의 침이

마르기도 전인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배반합니다.

 이런 베드로사도에게서

우리는 두 가지 모습

보게 됩니다.

원죄를 지었던 아담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그 원죄를 기워 갚는 거룩한

성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만일에 성경이 인간들이 만든

소설책 같은 것이라면,

12사도 중 으뜸 사도인

베드로사도의 약점을

결코 썼을 리 없습니다.

베드로사도를 미화시키고

멋있게 만들었겠지요.

하지만 성경을 보면

사탄의 소리를 들을 정도로

베드로 사도에 대한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베드로 사도의 신비는 뭐냐?

죄를 지을 때마다 짓고 난 후

 결과를 보면, 짓기 전보다

예수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겁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끈이 연결되어있지요?

죄를 지을 때 마다

그 끈이 끊어집니다.

회개를 통하여 다시 매듭을

지어 그 끈을 연결하면,

 매듭이 매지기 전보다

거리가 짧아 졌겠죠?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보면

용기가 나요.

내 성격도 욱하고,

죄를 많이 짓고,

입으로도 막말하고

금방 후회하고..

 이런 베드로사도를

주춧돌이라 합니다.

지붕과 기둥은 흔들리다가도

자리를 잡지만, 주춧돌이

흔들리면 집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1대 교황이신 것이고,

지금도 천국 수문장을

하시는 거예요.

 다음 바오로 사도 묵상해 봅시다.

현대 신학을 바오로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 신학에는 바오로

영성이 묻혀있어요.

그러면 바오로 신학의 핵심,

영성의 핵심은 무엇이냐?

김웅열 신부의

 한 평생 묵상입니다.

바오로 사도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동일화”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 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 한 줄의 말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영성의 핵심입니다.

 풀이하면,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고 용서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되어 용서하고,

그리스도가 되어

느끼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시기에 내가 용서하고 사

랑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비슷한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오로 신학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필리피서

2장 5절에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개신교신자들은 꿈도 꾸어보지

못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신비를 성체를 영할 때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간직하게 되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 사랑하고

용서하고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동일화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의 서간에는 많은 지침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를 자주 생각하고

바라보고 묵상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묵상해야합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자주 쳐다보십시오.

하루에 몇 번이나

거실에 걸린 십자가를

쳐다보십니까?

십자가는 자꾸 쳐다볼수록

리스도를 닮게 해주는

 신비가 있습니다.

아이돌 무대에서 뛰면,

그 공연장 간 아이들은

그 아이돌과 비슷하게

입고 따라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과 비슷하게 옷도 입고

말투도 따라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그리스도와의 동일화가

가까워집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와

동일화되는 방법은 영성체입니다.

모든 방법 중에 어쩌면

그리스도와 동일화가 되는

가장 으뜸이 아니겠는가?

성체를 영할 때마다

성모마리아처럼 예수님을 품안에

잉태하는 행위가 바로 영성체입니다.

태중의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모아

열심히 사신 그 어머니 마리아처럼

매순간 영성체로써 그리스도께

생각과 마음을 모아

사는 것이 영성체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며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반드시

예수님을 낳아야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체를 영하고

 이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합니다.

남편에게, 자식들에게,

구역반원들에게 예수님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방법은 고통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바오로사도는 처절히 경험하셨지요.

고통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느낍니다.

 코린토 2서 12장 9절에

바오로사도의

가시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오로사도는 불치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대의학자들이 조심스레

간질이라고 추정합니다.

설교를 하다 갑자기 거품을

물고 땅바닥에 뒹굴고,

깨어났을 때 자존심상

죽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3번이나

간절히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 써먹으시려면

이 가시 좀 뽑아주십시오.”

그런데, 안 뽑아주십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 말씀을 듣고 바오로사도는

고통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환을 합니다.

수치요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내 고통이

주님께서 오시는 입구였구나!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바오로 신학은

고통의 신학입니다.

영성체도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이요,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도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이지만,

바오로 사도는 특별히

순간순간 찾아오는 내 십자가,

내 고통이 예수님과 하나 되는

중요한 동일화의 방법임을

성서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와의 동일화에

마지막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 21)

그 외에는 쓰레기처럼

여기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의 전부가 아닌

다음에야 세상의 어떤 가치도

아름다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더 가까이 느꼈고,

죄짓고 난 다음에 훨씬

예수님과 가까워졌듯이

우리도 희망을 가집시다.

절대 주저앉지 말고,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죄인이라는 것,

스스로에게 격려합시다.

의기소침하게 살지 맙시다.

또 억지로 지는 십자가가

있다하더라고

주님은 그것마저도

기뻐하신다는 것 잊지 말고,

어찌 십자가를

솔직히 기쁘게 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부분 우리들

정말 힘들게 지고 삽니다.

마지못해 지는

십자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은

대견해 하십니다.

 그러니 너무 주눅 들지 말고,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본받고 그리스도와 동일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에

힘쓰며 살다가 삶을 마치고

그 분 곁에 갈 때, 이런 말을

외칠 수 있도록 합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습니다.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아멘

 ♣ 2017년 07월 은총의 밤(7/1)

배티성지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배티성지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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