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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18 조회수3,557 추천수3 반대(0) 신고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캐럴 타브리스(Carol Tavris, 1944- )가 말했습니다.

 

누구나 눈으로 보아야 믿으며 보고 나서는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누구나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이 주는 정보만 믿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든 무엇을 하든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든

 

자신이 믿는 대로만 행동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믿음을 확신시켜주는 증거만 보고 싶어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본성을 꼬집어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활함은 한 가지만 추구하게 만듭니다.

 

책임질 것 없이 사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정교육이나 공 교육을 통하여 잘못된 가치관을 갖게 되고,

 

성직자들은 무책임하게 평신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고

 

평신도들을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에 빠지게 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살게 하고 있습니다.

 

 

 

무지(無知)는 모르는 것을 뜻하지만 무명(無明)은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깨닫지 못하면

 

확증편향에 빠져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잘못을 알아도 자기변명만 하려고 듭니다.

 

회개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 같습니다. 

 

 

 

성직자들로부터 세뇌 되어 잘못된 가르침을 받고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는 기복신앙을 믿으며 저마다 다른 하느님을 믿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성직자들은 아무 책임의식도 없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더라도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성찰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 성찰은 하지 않고 복만 바랍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따로 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참 나를 찾지 못하고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수행(修行)을 하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 생활을 시작 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였습니다.

 

자신의 꼬락서니를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뿐더러

 

참회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사랑하고 사는 것진리이고

 

어떤 종교를 믿든 이 진리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옥한흠 목사가 많은 목사들에게 설교하면서

 

여기 계신 분 중에서 성경을 왜곡한 적이 없는 분은 앞으로 나와 보십시오.”하고 말하자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성경을 어떻게 왜곡했다고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요한 타울러 신부님의 강론을 보고서야 성직자들이 진리의 길로 인도하지 않고

 

종교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울러 신부님의 강론을 읽고

 

만약 교회가 일찍부터 진리를 가르쳤다면

 

종교개혁도 일어 나지 않았을 것이고

 

기복신앙도 판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빨리 개선되지 않으면

 

유럽의 교회처럼 신자가 없는 관광지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영어에 “Familiarity breeds contempt.”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 익은 것일수록 하찮게 여기는 법이다.”는 뜻입니다.

 

거죽만 보고는 결코 알맹이를 보지 못하므로

 

어떤 사물도 예사롭게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체스터턴(G.K. Chesterton)이 말했습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려면 눈에 익은 어떤 사물도

 

눈에 낯설어질 때까지 뚫어지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공회의 알란 존스(Alan W. Jones, 1940- ) 신부는 이를 두고

 

잘 알고 있던 것들을 버리는 과정(process of unlearning)’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우리는 정상적인 것 가운데서 비 정상적인 것을 보고,

 

인간 안에서 빛나는 신성(神性)을 보고,

 

친숙한 사람의 얼굴 뒤에 있는 광배(光背)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미국의 여류 선사(禪師) 샬럿 조코 벡(Charlotte Joko Beck, 1917-2011)

 

『살아있는 선(Nothing Special: Living Ze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은 종교적인 수행(修行)입니다.

 

종교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separate)’ 것을

 

다시 바라보아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rejoin)’ 것을 의미합니다.

 

() 수행(修行)이 우리가 다른 것으로 생각하던 것을

 

하나로 볼 수 있게 도와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을 돌보려고 한다는 면에서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와 수행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모든 수행은 화를 다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화는 자신을 분열시키는 감정입니다.

 

화는 옳은 것들을 둘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모르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삼라만상의 법칙, 우주의 근원, 등 우리가 알려고 하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여(rejoin)’ ‘불이(不二, nonduality)

 

선악(善惡)과 미추(美醜)와 생사(生死)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는 것

 

깨닫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그 예입니다.

 

 

 

<불이(不二, Non-Duality; Desperately seeking simplicity and unity)>

 

잘라루딘 루미(Jalaluddin Rumi, 1207-1273)/후고(後考) 옮김

 

 

 

이제 나는 나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내 마음은 유일한 진주이기도 한 참 나를 찾기 위하여

 

깊은 바다로 잠수해 들어가서 진주를 캐려고 하지만,

 

파도가 무서워서 친구들의 도움을 청하며

 

불이(不二, Non-Duality)를 생각하면서

 

오로지 참 나만 찾기 위하여

 

나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참 나를 찾으려면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하나 되기를 바란다면

 

지금 당장 계시(啓示)의 속삭임을 들어야 합니다.

 

그대가 진정으로 하늘로 날고 싶으면

 

이 속된 땅을 버리고 날아올라야 합니다.

 

하늘에만 둥지를 틀고 있는 내 영혼은

 

이 땅에 있는 둥지에 싫증이 나서

 

몸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날기만을 바랍니다.

 

………………………………………………….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이슬람 성인이었던 잘라루딘 루미는

일찍이 불이(不二)를 깨닫고 중도(中道)의 길을 갔습니다.

 

사실상 진리를 발견하려면 이분법적인 생각을 가장 먼저 버려야 합니다.

 

세상 것을 버리려면 세상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난하게 살면서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망상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미는 인간의 망상인 착각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실은 암묵적으로내 눈은 밝다.’는 것을 말하며

 

결국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내 눈이 충혈되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며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미는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는 인간을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라>라는 시()에서

언제까지 지저분한 주막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참이냐?”고 꼬집었습니다.

 

 

 

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라.

 

아니거든 이 무리를 떠나거라.

 

반쪽 마음을 갖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느님을 찾겠다고 나선 몸이

 

언제까지 지저분한 주막에 머물러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참인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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