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7.22."여인아 왜 우느냐." - 파주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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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문숙 | 작성일2017-07-22 | 조회수3,10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요한 20,11-18(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 2016년 6월 3일 교령을 발표해 의무 기념일이었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정하셨습니다. 교종께서는 오늘날 교회가 여성의 존엄,새 복음화,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신자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를 모범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가톨릭 여성신학자 최우혁 씨는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이 축일로 승격된 것에 대해, “제도화되고 부패하기 전의 교회,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부활에 충실한 복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 중의 사도”라고 부른 것을 언급한 것에 대해,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이고,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로 보는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요한 20,11). 스승을 잃고, 스승의 시신마저 잃은 슬픔이 너무도 커서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으로 달려왔던 베드로와 요한마저 돌아가 버리고, 그녀는 마치 버려진 채 남았습니다. 그만큼 뜨겁고 열절하게 사랑한 까닭입니다. 그러다가 천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만, 사랑의 눈은 여전히 스승을 찾아 애타게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오시어 부르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렇습니다. 사랑의 눈물은 죽음마저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울음 울 때, 그분이 이미 우리 안에서 울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이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이미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찾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슬퍼하는 이들 안에서 함께 울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려움이나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어려움과 슬픔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덤 속에 누워 계신 분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 지금 우리의 일상이 벌어지는 곳,우리의 삶의 현장에 그분이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상처받고 버려진, 무력하고 무능한, 가난하고 아픈, 비천하고 낮은,작고 슬퍼하는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분명,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곁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야만 말씀은 살아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오늘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이미 부활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의 승리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마침내, 마리아 막달레나는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스승의 음성을 들으면서 기쁨으로 전환됩니다. 빠져있던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본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온 까닭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며 눈을 열어주시듯이,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아침을 차려주며 당신임을 알려주시듯이, 마리아에게 사랑 가득 찬 음성으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 각자를 부르십니다. “아오스딩아!”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라야, 그분을 알아봅니다. 또한 자신을 알아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시고, 당신이 더 이상 무덤 속에 누워 계시지 않으시기에,죽음의 무덤에서 우리를 불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루카 24,38-39). 이제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곧 믿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내가 모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마음의 눈을 열고,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을 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삶 안에서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단지 말씀만 받아 전한 것만이 아니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고 그분의 부활도 증언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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