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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16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23 조회수3,999 추천수11 반대(0)

동생 수녀님이 지난 2월부터 명례성지로 소임을 받아서 지내고 있어 밀양 명례성지엘 다녀왔습니다. 명례성지는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에 조성되었습니다. 복자의 생가 터는 축사로 사용되고 있었고, 성당은 다 허물어져서 있었다고 합니다. 성지 담당 신부님께서 10년 전에 생가 터를 매입해 야외 제단을 만들고,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습니다. 성당은 다시 복원해서 순례자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소금과 누룩을 팔았다고 합니다. 소금처럼 사람들 속에 녹아들어서 기쁨을 주었다고 합니다. 누룩처럼 공동체에 활력을 주었다고 합니다. 잡혀갈 때 형제들이 돈을 모아서 포졸들에게 주려고 하자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나는 풀려나도 다시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이 될 것이니, 포졸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축사로 쓰이고, 허물어졌던 성당이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가 된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지를 보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지만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듯이 잡초가 우거졌던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는 순례자들이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드러날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그리고 싶은 화가가 사람들 중에서 모델을 찾았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 소년의 모습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화가는 그 소년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의 모습을 보았고, 소년을 모델로 삼아서 요한 사도를 그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화가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유다를 모델로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화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의 모습을 보셨다고 했는데, 지금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모습이 보이나 봅니다.” 화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순수하고 아름다운 요한의 모습도 있고, 일그러지고 어두운 유다의 모습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원주민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검은 늑대는 남을 속이고, 미워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늑대란다. 하얀 늑대는 용감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늑대란다.”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럼 검은 늑대와 하얀 늑대가 싸우면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네가 겁을 먹고, 남을 미워하고, 속이는 일을 하면 검은 늑대가 하얀 늑대를 이긴단다. 그러나 네가 용감하게 길을 걷고, 친구들을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면 하얀 늑대가 검은 늑대를 이긴단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가능성의 나라입니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는 나라는 아닙니다. 지금 부족한 사람도, 지금 잘못한 사람도 함께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아주 작은 양이지만 빵을 커다랗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시작은 비록 작을지라도 끝은 아주 풍요로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작은 겨자씨는 자라면 새들이 깃들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생명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커다란 코끼리도 그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크기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움이 함께하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암에 걸렸지만 완쾌된 사람들은 대부분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결코 암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암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 암을 미워하고 저주하기보다는 오히려 내 안에 들어온 손님으로 맞이하였다. 나의 삶이 암이 들어올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한 면도 있기에 친구처럼 지내려고 하였다.’ 이런 마음가짐이 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통을 주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암과 투쟁하고 싸우면 싸울수록 더 힘든 상황에 이르는 것도 보게 됩니다.

 

적과의 동침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걱정도 되고, 힘들게 만들어 놓은 공동체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버림받은 이들, 잘못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관대함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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