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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7.2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29 조회수3,612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7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제1독서 1요한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복음 요한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건물

축복식을 했던

기억이 떠올려 집니다.

 예술적으로 지어진 5층짜리

건물이어서 그런지 내부가

 무척이나 복잡한 구조였습니다.

 저는 건물주인 형제님의 안내를

받아서 건물 구석구석에

성수를 뿌렸습니다.

축복식을 마친 뒤,

함께 했던 분들과 함께 간단한

 다과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속이 불편해지면서

화장실에 얼른 가야만 했지요.

저는 주인 형제님께 조심히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분께서는 친절히 화장실

앞까지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일 보십시오.”
당황스러웠습니다.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듣기 거북한 소리도 날 텐데

바로 문밖에서 기다리신다고

하니 얼마나 당황스럽던 지요.

뱃속에서는 빨리 화장실로

들어가라고 계속해서

요동을 쳤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님, 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니까요.

저 그냥 놔두고 얼른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이분께서는

“아니, 어떻게 신부님을

혼자 있게 둘 수 있습니까?

걱정 마시고 일 보십시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급해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들어갔지만,

화장실 안에서 얼마나 쑥스럽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나를 좀 그냥 놔두지...”라는

말과 함께 원망이

저절로 생깁니다.
어떻습니까?
이 형제님께서는

분명히 저를 배려하느라

화장실 앞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편했을까요?

그분의 배려는 오히려 저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습니다.

여기서 배려는 저를 자유롭게

놔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배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께서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아니었을까요?

이것이 주님 사랑의

표시이고 은총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것이며

그래서 감사와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입니다.

마르타 성녀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그 믿음을 오늘 복음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오빠인 라자로의 죽음을

외면했다면서 분명히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전혀

망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증거하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시는

주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옳은 길로 이끄시는

사랑 깊은 주님의 배려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 대해 주님께 원망을

하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찾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재미있는 삶이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의미있는 삶이다.

(주철환)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

"카페에서..."

전에도 새벽 묵상 글에서

 쓴 적이 있지만,

저는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카페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시켜서

마시면서 책을 펼쳐 읽지요.

그러면 새로운 영감들이

 떠올려집니다.

누군가 제게 말합니다.
“카페에 왜 가세요?

너무 시끄럽지 않습니까?”
전에 뉴스에서 보았던

약간의 소음이 오히려

집중력을 향상 시킬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말하면서,

저 역시 카페에서 집중력이

생겨서 간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조용하기로 치면

 방이 최고입니다.

 또한 커피도 얼마든지

마실 수가 있고,

 원한다면 음악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카페를 찾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봅니다.

 어쩌면 외로움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아니, 혼자 사는 사제가

외로워하면 어떻게?’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싫어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세상 안에서 주님을

느끼면서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지,

완전한 고립을 통해서는

기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그 세상을 적대시하면서

혼자만의 삶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적대시하면

할수록 그 안에 계신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 세상의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내세우면서 세상과 분리될 때,

주님과도 분리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서울에 있는 모 카페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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