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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불어 삶/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15 조회수3,159 추천수1 반대(0) 신고

 

"더불어 삶"

오늘 복음 묵상 중 떠오른

여러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얼마 전 “물러나는 대통령이

지지율 80%라니…”는

신문 기사 제목이 언뜻

눈에 띠어 읽어 보았습니다.

8년 임기를 마치고 퇴장하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에 관한

신화와 같은 기사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은 4년 밖에 받지 못한 채

산전수전 다 겪은 후 대통령이 되어

재임 8년 중 성과가

참으로 눈부셨습니다.

2003-2010까지

성장률0.5%-7.2%,

실업률12.3%-6.9%,

물가상승률10.4%-4.%,

빈곤층3200만명-신중산층 편입,

빈곤층43%감소 등

기적 같은 성과로

분배와 성장의 두 토끼를

다 잡았다는 극찬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괄목할 점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빈곤층을 감소시켜

성장의 과실을 ‘더불어’

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새삼 교육의 목적은

제 앞가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과

더불어 사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

이란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실 이 두 능력은

사회 공동생활에

필수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읽은

짧은  일화도 어렴풋하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느 부자이면서도 이웃을 도울 줄

몰랐던 인색한 할머니가

지옥에 떨어지자 옥황상제께

지옥에서 건져 달라 했더니

옥황상제가 착한 일 한 것

한 가지만 있어도 가능하다 했고

마침내 그 할머니는

간신히 가난한 이에게

 파 한 개 준 것을 기억해 내 말하자

하늘로부터 파가 줄처럼 내려왔고

그것을 잡으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니다.

웬 걸 파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많은 이들이 자기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보자

대노한 할머니는

온몸을 다해 흔들어

이들을 떨어뜨리자

파도 뚝 끊어져

자신도 다시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만 알고 더불어

살 줄 몰랐던 인정머리 없는

 할머니의 말로였습니다.

또 한 이야기는

어느 사람이 뜻밖의 은총으로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다 합니다.

신기한 것은 둘 다

똑같은 환경인데

천국의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에 얼굴은 빛났는데

지옥의 사람들은

기쁨 없는 얼굴에 몸은

 말할 수 여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웬일인가 가만히

밥 먹는 것을 들여다보니

두 쪽 사람들은 다 뻗힌

팔을 구부릴 수 없었는데

천국의 사람들은 숟가락에

밥을 떠 서로 먹여 주고 있었고,

지옥의 사람들은 구부릴 수 없는

팔로 서로 자기만 먹으려 하기에

먹지 못해 결국 말라 죽게 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평범하듯 하나 심오한

진리가 담긴 이야기로

더불어 삶이 바로 천국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 오래 전에 스치듯

읽은 이야기인데

선명한 기억으로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올랐습니다.

또 오늘 복음 묵상 중

떠오른 게 삼각형 이었습니다.

하느님, 나, 너의 세 꼭지 점을

연결한 삼각형이었습니다.

온전한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삼각형 구조의 공동체적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삼각형 구도에서 보면

오늘 말씀

이해도 분명해집니다.

위의 꼭지 점에 하느님이 있고,

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단히

우리를 높이의

 삶으로 전환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를 보십시오.

하느님 꼭지 점이 없습니다.

하느님 의식이 전무한 사람입니다.

위로 하늘 한번 바라보지 않은,

전혀 높이의

영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자리에 그대로

재물 우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게 살았다.”

전혀 탓할 바 없는 모습입니다.

내가 벌어 내 맘대로 쓰는 데

죄책감도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있어도 재물과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재물 우상을 섬김으로 하느님과

단절될 때 구제불능입니다.

하여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질타하는 대상 역시

탐욕에 눈먼 부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이들에게 가차 없이

심판을 선언하는 아모스입니다.

복음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지옥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는

 복음의 부자의 처지와 흡사합니다.

오늘 2독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이것들을 피하십시오. 

 오히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니다.”

재물 우상 대신 하느님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것들을 피하십시오.

가빠졌는데 이 빠진

내용이 중요합니다.

바로 전 구절

(1티모1,9-10)

‘이것들’에 해당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삼각형 위의 꼭지 점

자리에 하느님 대신

돈을 놓아 패가망신한 사람들,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요.

삼각형, 옆 꼭지 점에

너로 대변되는 이웃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가 부단히

우리를 넓이의 삶으로 전환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는 너의 이웃인

라자로와 완전 단절 상태입니다.

하느님과의 불통에 이어

이웃과의 불통입니다.

‘그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너무나 실감나는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이렇게 현실적입니다.

뜬구름 잡는 환상이 없습니다.

과연 나는 이런 부자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실 이런 부자들 부

지기수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이를 집

대문 앞에 놔두고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 수 있겠는지요.

사람이 부자가 되면

이렇게 막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자에게 거지 라자로는

사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보다 하느님께 대한

모독도 없습니다.

더불어 구원인데 부자는

재물에 중독되어

라자로와 단절됨으로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로

높이의 삶을 잃었고,

이웃인 라자로와의

더불어 삶의 단절로

넓이의 삶을 잃었습니다.

바로 복음의

‘큰 구렁’이 상징하는바

바로 이 단절의 구렁입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 놓여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이미 살아생전에 생긴 단절의

큰 구렁이 죽어서도

계속됨을 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

너와의 단절로 고립된

지 점 하나의

나가 바로 지옥입니다.

하느님 없는 나는,

이웃 없는 나는

하나의 환상입니다.

도저히 나를 알 수 없어

환상 속의 깊이가 없는

거짓 나의 천박한 삶입니다.

산전수전 삶의 현실체험을 통해

깊이에서 발견되는 참 나입니다.

바로 부자들의 삶은

현실 삶이 아니라

환상 속의 삶이기

십중팔구입니다.

동병상연입니다.

부자가 어찌 가난한 삶의

현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에어콘 장치가

잘 된 곳에 사는 이가

농사꾼의 뙤약볕 더위를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많은 이들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단절된 삶을 삽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완전히 하느님 현실과,

이웃 라자로 현실과

단절된 환상 속의 삶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얻고 자기를

잃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환상과 현실을 이번 중국 여행 중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림에서 본 백두산 천지의

사진의 환상과

실제 눈으로 본 백두산

천지의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얼마나 환상에 속아

살아가는 사람들인지요.

어느 미국인이

 ‘너는 왜 사진을 안 찍느냐?’

물었을 때 저는 빙그레 웃으며

짧은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I take a picture in my heart).”

백두산 천지보다 제가 더 즐긴 것은

백두산까지 천리 이상 거리에

7-8시간 차타고 가면서

끝없이 펼쳐지는 길림성

만주 대평원의 현실이었습니다.

삼각형 구조의 공동체적 인간입니다.

첫 꼭지 점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높이의 삶입니다.

둘째 꼭지 점인 이웃인 너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넓이 삶입니다.

셋째 꼭지 점인 나는 하느님과,

또 이웃인 너와의 관계와 비례하여

참 나의 깊이의 삶입니다.

하느님과 너와 나와

 관계가 깊어지면서

높이의 삶도, 넓이의 삶도,

깊이의 삶도 이루어집니다.

이래서 좋든 싫든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공동체 삶은

참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총을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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