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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0820 - 가해 연중 제20주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20 조회수3,26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8 20 () 가해 연중 제20주일 복음 묵상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이사야서 56,1.6-7
로마서 11,13-15.29-32
마태오복음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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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 이사야서 56,1.6-7

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6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7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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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1,13-15.29-32

형제 여러분, 13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14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15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31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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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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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08 20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이사야 예언자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하고 예언하며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계시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유다인들의 불순종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퍼졌다는 역설적인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교도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다가 어떤 가나안 부인의 절박한 소원을 듣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딸의 고통을 통해서 구세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외침을 주위 사람들이 무시하였으며 예수님마저 그 여인의 인내심과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이방인 여인은 구세주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며 딸의 치유를 끈질기게 간청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식탁의 빵 부스러기 같은 은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한 어머니의 커다란 믿음으로 딸이 악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보편적 자비와 사랑을 드러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믿음은 주님의 몸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믿음은 마귀 들린 딸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고통과 속박이 클수록 좌절하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움을 갈구하게 됩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의 가나안 여인은 주님을 선택하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온갖 비하와 소외감도 그녀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모든 고통을 이겨 내게 합니다. 믿음은 온갖 속박의 사슬을 끊어 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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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814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예레미야서 38,4-6.8-10
히브리서 12,1-4
루카복음 12,49-53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 불은 성령의 불, 하느님을 향한 열정의 불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불길이 훨훨 타올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길이 타오르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하시며 그 길이 수난의 길임을 역설하십니다.
진정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가치가 틀리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가족 관계나 인간관계에서도 의견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불화나 분열마저 생길 수 있지요.
이를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사상 체계나 정치 사회적 관습을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라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그 뜻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달라지며, 불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그분의 뜻에 맞는 것인지, 분별해 내야만 합니다. 지혜롭게 판단하지 못할 때, 또 다른 불화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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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8016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기념일)

잠언 9,1-6
에페소서 5,15-20
요한복음 6,51-58


신약에 가까이 오면서 구약 성경에서는 오늘 잠언에서 보듯, 지혜가 점점 의인화되어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구약의 예언서는 자주 세말에 주님께서 친히 잔치를 차려 주신다는 사실을 예고하는데, 이 말씀대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몸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 주시면서 오늘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그분의 약속을 보장받고, 또한 그는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아울러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동참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2독서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하고 제시합니다. 경외심을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이를 통하여 지혜 자체이시며 말씀(로고스)이시고 생명이신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에 초대받은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의 선물을 받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행복한지 곰곰이 살펴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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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817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사야서 56,1.6-7
로마서 11,13-15.29-32
마태오복음 15,21-28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 땅에서 몸소 집전하신 시복식의 기쁨과 감격이 여전합니다. 교황님의 이번 방한은 시복식만이 아니라,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인 아시아 청년 대회와 한국 청년 대회를 격려하는 의미가 큽니다. 교황님은 아시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직접 만나고자 하시는 열망이 강하셨습니다.
우리도 교황님과 마음을 함께하여 젊은이들이 신앙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복음적 가치에 따라 이끌도록 격려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아시아의 모든 젊은이의 앞날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축복해야 하겠습니다. 나라와 국경을 넘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된 소중한 체험은 젊은이들에게 진정으로 존중과 우애를 나누는 밝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아시아 청년 대회와 한국 청년 대회는 세계 청년 대회의 정신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의 젊은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친교와 사랑을 나누는 신앙 대회입니다. 이 젊은이들의 축제를 시작하고 그 정신과 영성을 심어 주신 분은 지난 4월 성인의 반열에 오르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계 청년 대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신앙 안에서 삶의 진정한 앞날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들의 가슴속에는 성령께 응답할 수 있는 감수성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관련한 이 일화는 젊은이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확신을 잘 드러내 줍니다. 언젠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있었던 수만 명의 젊은이들의 모임에 교황님이 함께하셨고, 그 자리에서 미국의 유명한 가수 밥 딜런이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담아 지은 ‘바람만이 답을 알리요’(Blowing in the Wind)를 열창하였습니다. 공연 뒤의 강론 시간에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답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다른 나라의 젊은이들과 더불어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된 진리와 자유를 신앙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큰 체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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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818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레미야서 38,4-6.8-10
히브리서 12,1-4
루카복음 12,49-5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불’은 『성경』에서 심판을 뜻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불이 훨훨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것은 세상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고자 하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의 경우에는 불이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루카 3,16; 사도 2,3.19 참조). 결국 세상에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를 없애 버리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세례란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란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사업이 이 세상에 참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인간은 본디 혈연과 학연, 지연 등 수많은 관계의 사슬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관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관계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태아가 탯줄 없이는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계 가운데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잡혀야 인간 본연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익숙하면 익숙한 만큼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얻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되새기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누리려면 무엇을 결단해야 하겠는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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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819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요한 외드 사제 기념일)

잠언 9,1-6
에페소서 5,15-20
요한복음 6,51-58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생명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여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 머물며 당신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맺은 관계의 출발점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하셨듯이, 빵 안에는 예수님의 수난이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주가 되려면 눌러 짜는 아픔의 과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마저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헌신적인 삶에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신다는 것은 우리도 주님께서 사셨던 사랑의 삶을 실천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삶을 실천하려면 빵과 포도주의 신비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은 주님의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을 받아 모시는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 그릇에 담겨진 사랑은 남에게 아무리 퍼 주어도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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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814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이사야서 56,1.6-7
로마서 11,13-15.29-32
마태오복음 15,21-28


배우자를 대신해서 죽을 수는 없어도 자식을 대신해서는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에게 자식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어령 박사가 신앙을 받아들인 데에는 딸과 손자의 고통이 있었다고 하지요. 딸이 그의 아들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겪다가 그 딸마저 실명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동안 종교는 문화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던 현대의 지성이, 딸의 고통을 보고 딸을 위해 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느 언론에서는 이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간 사건이라고 했지요.
이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놀랍게도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통과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량한 지식과 가진 것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교만하며 살지만, 인간의 한계 앞에서 결국 신앙만이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절박하게 애원하는 여인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온전히 항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매우 하찮다고 여기며, 주님 식탁의 빵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이성은 비로소 영성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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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8 15)


성모 승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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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8 16)
(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기념일)

잠언 9,1-6
에페소서 5,15-20
요한복음 6,51-58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성경 말씀이지만 거부감은 있습니다. 성체 신심을 알고 있는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가진다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반발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유다인들은 즉각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우리 역시 상식과 이해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인지요?
성체는 상식이 아닙니다. 성체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하늘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다만 영성체를 통해 접근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접근은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체는 하느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만남을 강조하시고자 ‘살과 피를 섞는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때마다 살과 피를 섞는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더라면 ‘그만큼 살아 있는’ 만남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모르면 성체는 다만 작은 밀떡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모르면 ‘하느님의 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살과 피’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성체를 모시라는 당부입니다. 영성체는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을 모시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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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8 17)

이사야서 56,1.6-7
로마서 11,13-15.29-32
마태오복음 15,21-28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마귀를 물리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딸을 괴롭히고 있는 마귀입니다. 이전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 때문에 고생하는 이에게는 언제나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묵묵부답하신 채 걷기만 하십니다. 보다 못해 제자들이 말씀드립니다. ‘여인이 저렇게 애원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엉뚱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강아지는 이방인입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어법이라고는 하지만, 생각하면 모욕적인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재치 있는 답변으로 예수님의 거절을 뒤집습니다. 여인의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적을 불러왔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교훈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겸손한 믿음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는다.’ 여인의 이 확신을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거절당할 때 여인인들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극복하였습니다. 서운한 감정을 믿음으로 뛰어넘었기에 기적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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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8 19)
(
성 요한 외드 사제 기념일)

예레미야서 38,4-6.8-10
히브리서 12,1-4
루카복음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은 세상이 확 바뀌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가 번쩍 뜨일 말씀입니다. 진정 그분께서는 욕심으로 얼룩진 제도를 바꾸러 오셨을까요?
적당주의에 물든 사람을 몰아내고 새 인물로 교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도가 바뀌고 조직이 교체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의 주체는 인간이기에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모두가 순간적 변화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는 변화입니다. 그 불을 내 안에서 일으키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작은 불이 서서히 타올라 큰 산을 태우듯이,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한 사람의 믿음이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를 받지만 마침내 반대하는 사람마저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한 가운데 홀로 입교하여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입교시킨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시련은 견디어 내면 보답이 주어집니다. 시련 속에서는 분열이 있었지만 결국은 은총을 위한 준비였던 셈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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