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역설은 상식에 어긋나지만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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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17-08-22 | 조회수3,16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마태 19,23-30)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답답한 요지경이지만
나는 내가 사는 이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해답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설’이란 통념과 반대되는 사고방식이며 상식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역설은 비판적이거나 음울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올바르고 선하며 진실한 일을 하면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어야 옳지만 칭찬은커녕 질투만 받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무시하려고 듭니다.
구약시대도 오늘날처럼 혼란스러운 세상이었습니다.
진리를 거부하고 거꾸로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싹수가 노랬습니다.
그래서 말로써는 성화(聖化)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시어 신약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아니라 몸으로 본보기를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육화(肉化)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혼돈스러운 세상에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가시로 꼭꼭 찌르시듯 자극적인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역설(逆說)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9,30)
또 바오로 사도는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게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2코린 12,10)
닛사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of Nyssa, 332-395)는
역설의 대가(大家)였습니다.
‘빛나는 어두움(luminous darkness)’, ‘정신이 말짱한 술 취함(sober inebriation)’, ‘현명한 바보(wise folly)’, ‘정중동(靜中動 stationary movement)’,
‘살아있는 죽음(living death)’, ‘열정이 없는 사랑(passionless love)’,
‘방심하지 않는 잠(watchful sleep)’ ….
영성(靈性)의 역사에는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정신을 집중할수록 더 좁아지고 좁아질수록 더 넓어집니다.”고 했으며
18세기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쟌느 귀용 부인(Mde Guyo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으로 가는 문은 너무나 좁습니다!
스스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문을 지나면 그 문이 너무나 크게 보입니다!
다윗이 말했습니다.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시어 나를 구하셨네.’(시편 18,20)”
그녀의 친구였던 프랑소아 페늘롱(Francois Fenelon) 대주교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비가 아닌 자기애(自己愛)로 인하여
끊임없는 불안한 생각을 하지 않고 믿음이 가득 찰 때
우리는 좁은 통로나 좁은 길에 있을지라도 넓은 곳에 있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에고에 둘러 싸여 좁은 곳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 벗어나 위대한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게 되면 우리는 커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십계명과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은 요약하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사랑의 계명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백성사를 끝내고 나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백소(告白所)를 나오고 난 후에는 곧바로 옛날로 돌아갑니다.
<역설적인 계명들(The Paradoxical Commandments)>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를 통해서 ‘역설의 진리’를 말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는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 집 벽에도 새겨져 있기에,
마더 테레사의 글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역설적인 계명들(The
Paradoxical Commandments)>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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