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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823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23 조회수3,35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8 23 () 가해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리마의 성녀 로사 동정 기념일)

판관기 9,6-15 / 에제키엘서 34,1-11
마태오복음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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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판관기 9,6-15

그 무렵 6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7 사람들이 이 소식을 요탐에게 전하자, 그는 그리짐 산 꼭대기에 가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8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9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0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2
그래서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5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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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에제키엘서 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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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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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8 23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리마의 성녀 로사 동정 기념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나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셈법으로 시기 질투하는 일꾼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영광의 차이가 있어도,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에 나보다 더 큰 다른 사람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너그러운 하느님을 표상합니다.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후하게 하루 품삯을 주신 하느님은 옹졸한 분이 아니심을 알려 줍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일할 것이 없는 일꾼에게 일자리를 배려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의 은총을 받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남이 자신보다 더 인정받고 영광을 받을 때에 상처받고 시기심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인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잘것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 눈에는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신앙을 부모에게 물려받아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나이 들어 뒤늦게 하느님을 섬긴 사람이나 모두 은총의 자녀입니다.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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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8 17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언뜻 보면 포도원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한 듯 보이지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모두 같은 품삯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대에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생활이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그날그날 벌어서 생활해야만 했기에, 이른 새벽부터 장터에 나와 일을 시킬 사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아무도 일을 주지 않기에 오후 늦게까지 장터에 서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주인이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똑같은 삯을 준 것은 공평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일할 의무가 있으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지요. 이런 이유로 주인은 모든 일꾼에게 품삯을 관대하게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봉사한 시간이나 결실보다 봉사의 동기와 정신이 더 중요합니다. 늦게 일하러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삯을 정하지 않았지요. 그저 자신들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인의 처분만 바랐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우리 역시 봉사를 한다고 주님께 그에 따른 대가를 바란다면 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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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819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요한 외드 사제 기념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고 전함으로써 복음서 저자는 우리가 이 본문을 비유로 읽고 묵상하도록 안내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늘 나라에서는 고용주인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을 후하게 대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한다면,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에 함축되어 있는 해결의 실마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지요. 포도밭 주인에 관한 이 말씀이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라면,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가지고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으신 분, 바로 그런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문을 모든 이에게 후하게 열어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아침부터 수고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 사람에게 마땅히 더 큰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논리가, 결국은 하늘 나라에서는 적용되지 않은 셈이지요. 저렇게 살고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사람이 실제로는 이미 와 있을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쪽에 달렸던 강도는 꼴찌였다가 첫째가 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 복음의 골자는 하느님의 자유이고 하늘 나라의 무상성입니다. 죄스러운 우리이지만, 그분의 후하심 덕분에 무한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에 가면 우리가 깜짝 놀라거나 당황할 일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지요. 반드시 와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이고, 와서는 안 될 사람이 이미 와 있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늘 나라에 와 있다는 놀라운 사실 …….
복음에 나오는 일꾼들처럼 하느님께서 너무 후하신 것 아닌가 하면서 시기 질투하는 옹졸한 사람이 되어 낭패를 보지 않도록, 더욱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다처럼 넓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넉넉한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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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8 20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교회는 오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기념합니다. 시토회 수도자였던 그는 중세의 사랑의 신비 신학의 정점을 이룹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그의 업적과 위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베르나르도는 수도회 신학을 최고 수준으로 고양시켰을 뿐 아니라, 인간의 개별성과 존엄성, 자기 성찰과 풍부한 감수성 등 12세기적 심성의 여러 요소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명상과 기도를 뒷받침하는 계기로 정립하였다”(클라우스 리젠후버, 『중세사상사』에서).
특히 구약 성경의아가에 대한 그의 해석과 통찰은 큰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는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오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초기 교부들의 우의적이면서도 신비적인 해석을 이어받아 꽃을 피웠고, 후대의 위대한 신비가들인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그리스도인이 열렬히 추구해야 하는 신적 사랑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다시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많은 지향과 감정과 정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피조물은 사랑을 통해서만 창조주께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신랑의 사랑은, 곧 사랑이신 신랑은 그 보답으로 단지 사랑과 성실을 찾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 보답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신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 자체께서 사랑 받으시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사랑받는 존재로서 그 사랑의 원천으로 향하고, 그 사랑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사명임을 베르나르도 성인과 함께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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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8 21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오늘 복음 말씀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든,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이든, 열두 시부터 일한 사람이든, 오후 세 시부터 일한 사람이든,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든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쁜 소식이 숨어 있습니다.
인력 시장을 상상해 봅시다. 품팔이 노동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모여서 일손을 구하는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100명가량이 모여 있더라도 그 사람들이 다 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 건강하고 일 잘하게 보이는 사람 30명만 뽑혀 갑니다. 그러면 나머지 70명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그날 돈을 벌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드니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손을 구하는 사람들이 또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렇게 해서 오게 되면 그 가운데 또 20명쯤은 일터로 뽑혀 갈 수 있습니다. 이제 50명이 남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어쩌다 일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매일 나와도 일할 기회를 갖기가 무척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약해 보이거나 나이 많은 노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늦은 시간까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성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벌어 먹여야 할 식구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그들의 딱한 처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첫째가 되는 사람보다 꼴찌인 사람에게 더 관심을 두십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활짝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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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8 22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은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맨 나중에 나와서 일한 사람은 분명 속을 태우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어도 자신을 일꾼으로 써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의 어려움과 마음고생을 깊이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후하게 하루 품삯을 준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어려움과 슬픔을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 주는 마음,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새벽 인력 시장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인력 시장에는 새벽잠을 설친 사람들이 저마다 하루 벌이를 위해 모여듭니다. 새벽 5시가 넘어서면 현장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이 시간을 맞추어 나오려면 늦어도 새벽 4시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일용직 노동자들의 시름과 슬픔을 안평옥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모닥불이다/ 선잠 깬 몇몇이 손 펴/ 녹이는 추위가 쿨럭쿨럭 기침한다/ 이글거리는 통나무 불꽃이/ 금방이라도 짙은 어둠 사를 것 같아도/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새벽 그 안에/ 한 무더기 시름 던진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자신을 데리고 갈 인력 회사의 차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데리고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처럼 불황에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쓸쓸하게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 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은 인생의 내일을 기대하기 힘든 삶을 이어 갑니다. 저마다 말 못할 사정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슬픔과 어려움을 헤아리는 마음,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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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8 17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피정 강의에 초대받아 이해인 수녀님이 계시는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누구나 한 번쯤은 수녀님 글을 읽거나 들어 보았을 정도로 교회 안팎으로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그날은 수녀님이 경비실에서 안내를 보는 소임을 맡은 날이었습니다. 오전 내내 경비실을 지키며 몇 편의 시를 쓰셨다며 행복해하셨습니다.
우리는 수도자들도 그가 가진 유명세나 능력만큼 특별한 대접이나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한 일이 크든 작든, 수도 생활을 오래 했든 짧게 했든, 하는 일이 어렵든 쉽든,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나 저녁에 온 사람에게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시는예수님의 셈법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남과 비교하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의 일은 남들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했고 더 많은 성과를 냈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오로지 주님과 맺은 관계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긴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가장 초라할 수 있고, 인간의 눈에는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어느 무엇보다도 큰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봉사하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상으로 자신이 한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한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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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8 18)


주님께서는 구약 시대 때부터 줄곧 사람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계약을 맺으신 것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당신께 돌아와 자유롭게 행복을 누리길 바라시는 뜻에서였습니다.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처럼, 주님께서 맺으신 계약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고, 그 삯은 사람에게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두 당신 나라로 불러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이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쉽지 않으신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가 이루어 드려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은 거저 내리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끝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는 그저 감사를 드려야 할 따름입니다.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저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그분께 받고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빈부의 차이, 신분의 차이, 학력의 차이, 남녀노소의 차이란 있을 수 없으며, 차별 대우란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되게, 오늘도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 정성을 다하며,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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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8 19)
(
성 요한 외드 사제 기념일)


임금이 궁중의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개와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무엇이냐?” “귀신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이유를 묻자, 화가가 답했습니다. “개와 말은 사람들이 너무 잘 알기에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귀신의 모습은 잘 모르기에 그리기가 쉽습니다.
개와 말은 흔한 동물이라 볼 기회가 많습니다. 화가가 아무리 잘 그려도 비슷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쉽게 시비를 겁니다. 하지만 귀신은 직접 볼 수 없기에 화가가 대충 그려도 사람들은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포도밭 일꾼들은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불평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주인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보면 많은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객관화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주관화하면, 언제나 ‘나만 고생하고’ ‘나만 억울한 것’ 같습니다. 살면서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삶’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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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8 20)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굽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굽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면도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도로가 직선뿐이라면 얼마나 밋밋할는지요? 좋은 일만 생기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무미건조할는지요?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기쁨으로 바뀐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삶이라도 비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는 힘든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보람 있는 일이 남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실은 틈만 나면 남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눈치 보기를 피해 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생의 참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삶의 설계도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재산이든 명예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어느 정도의 몫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게 받았다는 생각은 느낌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뒤에 와서 잠깐 일한 사람이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주인은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을 따지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믿음의 참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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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8 22)
(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라일락 꽃 속에 파묻힌 꿀벌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원을 그리며 날다가 꿀벌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역시 꽃 중의 꽃은 라일락이야. 가슴이 떨리도록 향기롭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비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장미꽃을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리고 저 들국화는 어떻고. 꿀벌아, 너는 정말 무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아니야. 라일락이 최고란 말이야.” 꿀벌은 결코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라일락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차라리 채송화가 더 낫겠다.” 나비의 이 말에 꿀벌은 속이 상해 입을 다물었습니다. 기고만장해진 나비가 꿀벌을 재촉하였습니다. “왜 아무 말도 못하니?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니?” 꿀벌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비야, 꽃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라일락은 그윽한 향기를 만들어 내지만 잎을 씹어 보면 얼마나 쓴지 몰라. 쓴맛은 자신에게 남기고 향기는 남에게 주는 아름다운 꽃이 라일락이야.

이 라일락의 우화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되새기게 합니다. 거름을 잘 준 화초가 꽃도 건강하고 열매도 많이 맺는 법입니다. 신앙생활의 거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선행입니다. 이는 또한 얼마나 많이 했는지가 아니라, 정성과 열정을 얼마나 기울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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