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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825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25 조회수2,721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7 08 25 () 가해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룻기 1,1.3-6.14-16.22
마태오복음 22,34-40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
사랑의 이중계명 >


오늘 우리는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기초가 되며 또한 삶의 기준이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 즉 구약의 골자이며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늘나라의 새로운 법이 되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6 5절의 말씀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과 함께 살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첫째 신조이며 생활의 규범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라'는 이 말씀은 완전한 투신을 전제로 하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총동원한 전 인격적인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레위기 19 18절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이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께 우선적으로 드려야 하는 사랑이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표는 눈에 보이는 이웃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내 몸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만 아끼는 이기적인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것, 간혹 죄에 떨어진다 해도 다음에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기대를 걸어주는 것, 내 장점에 감사하며 꾸준히 키워나가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게 관대해질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내용을 망각함으로써 자신의 조그만 희생조차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과연 희생이 없는 사랑이 가능합니까? 사실 누구나 희생당하기를 꺼려하지만, 사랑으로 희생하는 것은 실상 잃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아프리카에 한 선교사가 들어갔습니다. 그 때 마을 어귀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와, 가까이 가보니 삼형제가 사우고 있는 것입니다. 겨우 싸움을 뜯어 말리고는 도대체 형제들끼리 싸우고 있는 이유를 물으니, 제일 맏형이 "아버지가 엊그제 돌아가셨는데, 그때 소유재산의 전부인 말 열일곱 마리를 삼 형제가 나누어 갖되, 첫째는 1/2, 둘째는 1/3, 막내는 1/9을 갖도록 하라."고 유언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말이 열일곱 마리라서 산 채로는 도저히 나눌 수가 없는데, 서로 양보하지 않아서 싸움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선교사는 고민을 하다, 잠시 후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여기 내가 타고 온 말이 한 필 있습니다. 이것을 드리지요. 합쳐서 나누어 보시오." 하였다.

삼형제는 말 18필을 가지고 나누었다. 맏형은 1/2인 아홉 필, 둘째는 1/3인 여섯 필, 막내는 1/9인 두 필로 나누었습니다. 유산 분배를 마친 후 그들은 각자 자기 몫의 말을 끌고 가는데, 한 필이 남는 것이 아닙니까? 이 때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이제 다 나누었지요, 남은 말 한 마리는 저의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웃음을 띤 얼굴로 "내가 여러분에게 드린 말 한 마리는 사랑의 한 마리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있는 곳에 모든 것이 원만히 그리고 잘 해결될 뿐 아니라 더욱더 풍부하게 됩니다."고 말하였다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 사랑이 우리 인생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주며, 더욱더 풍부하게 해줍니다. 다만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구태여 첫째, 둘째의 계명으로 그 사랑의 순서를 정하신 이유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먼저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다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애매모호한 감상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베푸는 타인에 대한 봉사로 나타나는 인격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나갑시다.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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