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8.25.마태22,34~ 40 (파티마 성모님 한국순회 9일기도 넷째날) 파주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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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문숙 | 작성일2017-08-25 | 조회수4,15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마태 22,34-40(파티마 성모님 한국순회 9일기도 넷째 날)
오늘은 “파티마 성모님 한국순회를 위한 9일기도 넷째 날”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이 질문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22,35) 한 질문이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지혜, 곧‘토라’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세 기둥이 있습니다. 기원전 200년경에 의인 시메온이라는 랍비는 이 세 기둥을 ‘토라’, 곧 하느님의 가르침인 지혜, ‘경신례와 기도’, 형제애의 친교와 나눔의 실행이라는 말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각각 ‘지혜문학’과 ‘율법서’와 ‘예언서’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초대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에는 신자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여기서 “사도들의 가르침”(디다께)은 지혜를, “친교를 이루고 빵을 나눔”은 형제애의 실행인 자선을, “기도”는 경신례을 드러냅니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직무인 예언직, 봉사직, 사제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수도승생활도 ‘지혜’에 해당하는 ‘롁시오 디비나’와, “예배와 경신례”에 해당하는 ‘기도’와, 친교의 나눔에 해당하는 “일(노동)”을 세 기둥으로 삼아 지탱됩니다. 그러니,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이 질문은 그들의 삶의 원리요, 삶의 바탕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곧 그들 삶을 결정지어주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진지하게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을 최우선으로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을 내 삶의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가? 내 삶의 중심 기둥은 무엇인가? 대체,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이 대답 안에는 우리의 삶의 중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우리의 삶의 원리인 ‘세 기둥’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삶의 본질을 제시해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를 올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란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전제로 하여, 타자를 향하여 벌어지는 일입니다. 곧 ‘사랑“이란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루는 일’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분과의 진정한 관계를 이루는 길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곧 그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건네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한편,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당신을 온전히 건네주심으로써, 먼저 우리와 올바른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으로 우리는 이미 이 올바른 관계 안에 있게 되었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성부 아버지와는 하느님의 자녀(백성)라는 관계에, 성자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에, 성령과는 성령의 궁전이라는 관계 안에 있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제 이 사랑의 올바른 관계에 머무르기 위해서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지키는 것이요,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 됩니다. 곧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바로“첫째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이 “첫째 계명”을 앞서 말한 유대전통에 따르자면, ‘두 번째 기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지혜이신 그분을 사랑하여 예배하고 그분 안에 머물러 기도하는 것이요, 거룩해지는 일이요 성화를 입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과“둘째 계명”을 같이 말씀하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그렇습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맺음의 방식은 이웃들과의 사랑의 관계맺음의 방식과 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받은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칼 라너의 표현을 빌려보면,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요, 자기 양도’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계명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둘째 계명”도“첫째 계명”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실,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곧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근본적으로,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뿌리가 바로 이 바탕 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43항 참조)고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특히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서가 아니라, 한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 “둘째 계명”은 유다전통에 따르자면, ‘세 번째 기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분이 주신 사랑을 실현하는 일, 곧 형제애의 친교와 나눔이요 자선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이중계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사랑”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이것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 <성경>의 ‘첫 번째 메시지’이거나 ‘으뜸 메시지’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라는 낱말은 신앙의 용어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누구나 신앙인인 것은 아닙니다. 자칫 이를 놓치면, 마치 세상 사람들이 하는 교양적이고 인간적 사랑으로 흐르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도 이 말씀으로, “진리 안에 사랑”이란 <문헌>을 내셨습니다. 이는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곧“내가 주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이 사랑보다 앞서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가 ‘신앙이 세워지는 자리’ 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자리’ 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의 주님”이라는 관계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 계시된 ‘진리’ 위에 세워집니다. <성경>에 누차 표현되고 있는 바, 파라오에게 재앙이 내린 후에도, 바빌론 유배 후에도 거듭거듭 표현되고 있는, “내가 주 너의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시편>에서는 이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라.”(시 46,11)고 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주 너의 하느님”(마태 22,37)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해서 나의 주님이 되시는가?
그것은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외아들을 보내시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고,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러니,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을 입은 존재, ‘이미’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용서와 자비, 구원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주님”이라는 바로 이 사실이 바로 “진리”입니다. 이것이 유다전통에 따르자면, ‘첫 번째 기둥’에 해당하는 “지혜”입니다. 곧 하느님의 가르침인 진리입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곧 사랑이신 “주님”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나오게 됩니다. 곧 하느님께 대한 예배와 기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섬김과 봉사라는 ‘두 번째 기둥’과‘세 번째 기둥’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 ‘세 기둥’은 아주 중요합니다. 곧 우리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통합시켜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성경>을 듣는 일을 무엇보다도 앞세워야 합니다.‘첫 번째 기둥’인 진리를 깨닫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가르침(말씀)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입니다(예언직). 또한,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그분께 기도하는 일입니다.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성화를 입고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이는 전례와 성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두 번째 기둥’입니다(사제직).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입은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일입니다. 섬김과 봉사를 통해 친교와 형제애를 나누는 것입니다. 곧 애덕의 실현인 ‘세 번째 기둥’ 입니다(봉사직).
우리는 이 “세 기둥”을 성모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과 신심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곧 ‘첫째 기둥’은 성모님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요, ‘둘째 기둥’은 성모님께 대한 공경과 기도요, ‘셋째 기둥’은 성모님 말씀의 실행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를 균형과 조화로운 신앙생활로 성장시키고 통합시켜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모님의 대한 교의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성모님께 대한 공경과 전구를 드릴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성모님께 대한 봉헌과 신심을 드리되, 자칫 주관적인 신심의 열정으로 빗나가지 않도록 성모님께 보호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에 대한 가르침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 봉헌하고 기도하고 어머니 안에 머무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온전하게 성모님의 아들딸이 되고,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성모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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