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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8.3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30 조회수2,594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7년 8월 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 1테살 2,9-13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0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11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12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복음 마태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1951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의 풋볼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두 대학은 시작부터

과열된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치열하게 경기에 임했던

선수의 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린스턴 팀 선수 중 한 명은

코가 부러졌고 또 다른 선수는

뇌진탕 증세를 보여서 급하게

 들것에 실려 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더욱 더 경기는

과격해졌고,

다음 쿼터에서는 다트머스 선수

한 명의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경기는 프린스턴 대학의

승리로 끝났지만,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일주일 뒤,

각 대학의 학생들에게

 경기 녹화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거친 경기의 책임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먼저 다트머스 대학의

학생 중에서는

35%가 자기 대학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상대 대학인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 중에서는

자기 대학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시작했다고 말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상대팀에 책임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자그마치

86%에 달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이 영상을 평가한

사람들은 양 팀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트머스 대학의 35%와,

프린스턴 대학의 0%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맞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대 학교의 잘못은 크게 인식하고,

반대로 자기 학교의 잘못은

작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 사회에서 특히

만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댓글 창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치 전쟁터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요즘 문제시되는

‘묻지마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으로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십니다.

의인들의 몸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마땅히 성전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으로 차 있는

사람의 몸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죽은 자의 무덤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덤은 닫혀 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무덤 안을 열면

참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이렇게 끔찍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끊임없이

자비롭지만 타인에게는

너무나도 엄격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적대적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헬렌 켈러)

어제 아침 산책을 하면서 바라 본 하늘입니다.

"중독"

1984년, 그때 저는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습니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삶 안에서

뗄 수 없는 소중한 물건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솔직히 이 컴퓨터로

무엇을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바로 위의 형이 어디선가

컴퓨터 게임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서 설치를 하고

 실행을 했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전자오락실의

게임보다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공부하기 전에

기분 전환 삼아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멈춰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한 판만 더...’를 외치면서

하다 보니 게임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엄청나게 나쁜 시험 성적을

받은 뒤에야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이처럼 중독은 황폐한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임 중독만이 아니지요.

알코올, 니코틴, 도박

등의 중독을 보십시오.

몸과 마음의 황폐함을 겪고

나서야 겨우 벗어나지 않습니까?

래서 누구는 중독을 일컬어서

느리게 진행되는 자살 시도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나쁜 습관들은 쉽게 중독되고

벗어나기도 힘든데,

 왜 좋은 습관은 쉽게

중독되지 않을까요?
주님께 중독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지를 방문해주신

김포지구 가톨릭성서모임 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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