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1."기름을 사러간 사이 신랑이 왔다." - 파주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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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문숙 | 작성일2017-09-01 | 조회수2,74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마태 25,1-13(연중 21 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 처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25,13)
이 말씀은 우선, 우리가 지금 “이미 깨어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은 바로 지금, 우리가“이미 깨어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깨어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깨어있다’는 사실에 먼저 깨달아야, 비로소 ‘깨어 있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결코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빛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아니’완성되어 있다하더라고 말입니다.우리의 눈이 어두워 볼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이미’ 자비와 사랑을 입은 존재요, ‘이미’ 구원받은 존재 입니다. 그러니 “이미” 빛은 왔고, 우리는‘이미’ 빛 속에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 36,10).
그런데, 또 하나의 사실은 ‘주님께서 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5,13)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곧 이것이 깨어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이는 우리가 오실 신랑을 향하여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깨어있음’은 동시에 신랑을 향하여 있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싸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또한 그것들은 우리가 깨어있게 하는 도구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깨어있음”은 신랑이 오심을 예비함, 준비함, 기다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미래는 현재 안에서, 현재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현재를 등하시하는 것은 결국 미래를 등한시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현재를 살되 미래를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어느 한 순간도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고, 깨어 있으며, 하느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방심한 사이에,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깨어있음”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둘째>는 일상 안에서 매일 당하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 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란 마지막 날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임과 동시에, 날마다 악한 자와의 싸움에서 깨어 단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현세생활에서 당하는 유혹은 곧 종말에 닥칠 환란의 예고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깨어있음”이란 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므로”(마르 1,15),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는 것이요, 동시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곧 ‘언제나 계시며,또한 오시는 주님’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기다림 입니다. 희망함 입니다. 어찌 보면, 인생은 그야말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생 또한 이러한 기다림이 있기에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중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 소중하기에 기다립니다. 소중함이 없다면 기다림도 그리움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는 임을, 소중한 임을, 주님이신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죽음마저도 소중하게 기다립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강렬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은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 시킨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그저 스쳐 지나서 통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역사 안에 임하십니다. 곧 당신의 구원계획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는 일은 이처럼, 가장 소중한 일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강렬하게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진정 오실 분이시기에,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립니다. 그리고 기다림은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됩니다. 그것이 곧“깨어있음”이 됩니다.
“깨어있다”는 것, 그것은 단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잠들지 않고 있되,“기다리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주인이신 신랑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임이 오면, 영접하려고 문을 열고 대문간에 나와 기다리는 것입니다.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열망 안에 임은 “이미”자리 잡고 있습니다. 임을 지향하여 깨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임을 지향하여 할 때, 진정 깨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깨어있는 이’란 곧 임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미 빛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미 깨어있는 이들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등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나 홀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임께서 나와 함께 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우리 안에서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깨어계시는 임께서는 어김없이 저희를 휩싸고 돕니다.
이제 그 불과 함께 우리 자신이 활활 타올라야 할 때입니다. 나는 죽고, 임은 활활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도 임께서는 우리에게 오시어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지금은 임을 기다려오던 그 그리움으로, 얼른 문을 열어 임을 덥석 반겨 맏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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