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3."제 집자가를 지고"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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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문숙 | 작성일2017-09-03 | 조회수3,30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마태 16,21-27(연중 22 주일) 오늘 <말씀전례>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일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아는 기원전 6백년 전후, 유다왕조가 이집트와 연합하여 바빌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오히려 “유다는 망해야 한다. 바빌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유다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사제, 거짓 예언자들과 관리들이 일어나 예레미아를 잡아 가두고 폭행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고통당하고, 폭행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원망조로 이렇게 읊조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20,8)
그러나 모두에게 저버림을 받아도,자신이 반역자로 취급될지라도, 결국 외쳐야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존재의 근거요 힘이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수락하는 삶,그 안에 구원이 있음을 본 까닭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본 까닭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믿음이 구체적으로는 봉헌이란 형태로 드러나게 됩니다. 곧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곧 일상의 크고 작은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거룩한 산 제물”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이는 우리도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제물을 통해서,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을 믿는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의 메시아적 행위, 곧 구원의 행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곧 당신 자신을“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말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21절)는 예고 말씀으로, 승리자와 통치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메시아가 수난을 받아 패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22-23절)는 베드로와의 대화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예고요, <셋째>(24-28절)는 고난 동참 요구와 상급 약속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의 동참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 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양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하고 우리를 질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사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마주치게 되면, 곧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우선 그것을 피하려 합니다.그러다가 피해지지 않으면, 그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없애버리려 합니다. 풀어 해결해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피해지지도 제거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습니다. 어쩔 수없이 견뎌내야만 하고,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돌파구가 없다 싶으면, 결국 그것을 뛰어넘어버리려 합니다. 초월해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가 닿은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십자가인 현실입니다. 곧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적당히 거리 두는 법을 익히고, 적당히 무관심과 타협하고, 적당히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을 만큼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자신을 변호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자기기만과 자기 위선, 그리고 자기모순과 자기 부조리, 이 부조화와 혼란은 결코 벗어나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거하거나 없애려하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 견뎌 내거나,뛰어넘어버리거나 초월해버리거나,혹은 무관심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지 기꺼이 흔연히 자발적으로 오히려 순명으로 사랑으로 그것을 지고 가셨습니다. 바로 십자가 그것에 구원이 있음을 믿으신 까닭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할 때, ‘지고’ 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끓어 앉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처럼, 십자가는 마지못해 무겁게 억지로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는 것이요, 사랑으로 끓어 앉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억지로 지거나 마지못해 지지 말고, 오히려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으라고, 그리고 사랑으로 순명하여 끓어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십자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곧 십자가를 수락하는 삶 안에 구원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힘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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