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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하느님께 선택받은 자의 삶)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04 조회수1,419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의 삶

+ 찬미예수님

 우리들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버리거나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또 아무리 달아도 

 ‘내가 이거 먹으면 죽지,

이건 독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무리 유혹해도

강하게 저항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의

첫 번째가 뭘까?

천주교 신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고,

모든 감사함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됩니다.

이것을 잊으면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으로

살다가 갈 겁니다.

사제로 선택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사제도 직업인이 됩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왜 나를 선택하셨을까”

그리고 “선택받은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하는 묵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주님께서 어부를

부른 것에 대한 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그 답안에 선택받은

자에 대한 삶의 모습,

 삶의 방향이 제시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부를 부르신 것에 대한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두 쌍의

 형제 어부를 불렀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구체적으로 어부를

지칭한 것은 네 사람이지만,

 실제로 어부출신 사도는

몇 명 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어부들이라는

직업의 위치는

 대단한 사람이었겠는가?

 당시 제일 밑바닥

직업은 돼지 치는 직업,

그 다음이 목수였고,

그 다음이 어부였습니다.

이런 어부를 예수님께서는

뭐 써 먹을게 있다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가운데 예수님 따라다닌

사람이 있었습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제자로 써 달라고 매달린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또 열두 사도의 구성원들은

평상시 길거리에서

만나면 원수 같은 사이인

사람들도 있었죠?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스는

매국노를 처단하고 암살하는

열혈당원 조직원이었고,

마태오는 로마사람들 밑에서

빌붙어서 같은 민족들의

돈을 뜯어내는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이렇게 극과 극의

삶을 살던 열둘이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을 한 가운데

모셨다는 일치,

하모니라는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어부를 부른

이유는 신학생 때부터

저에게는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왜 주님이 그 많은

사람 중 어부들을

그렇게 많이 선택했을까?

 이 어부들을 부른

이유만을 안다면

내 성소가확실해진다.

그리고 절대 사제로서의

삶이 빗나가지 않고,

직업인이 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주님의

습 닮은 사제로

희망이 있다.’

그래서 저는 왜 어부들을

부르셨는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부제 때 사제서품

대 피정을 하면서

그야말로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셨지요.

10년 동안 고민하던,

이 세상에 나와 있는

성서에 대한 주석서,

해석서를 찾아봐도

답이 없었던 그것이

사제서품 대피정에서

영성체후 성체에 감사를

드렸을 때 선

명하게 활자처럼

지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있었죠.

 예수님께서 어부를 부른

 첫 번째 이유는 무소유성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

나 따라 오너라.’하시니

낡은 그물 버리고

몸뚱이만 따라갔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배를

버리고 가족을 버립니다.

 갈리레아 호수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출렁거리는 파도와

낡은 배에 의지해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이

따라오라 하니까

따라나설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주님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포기에 시간이 걸립니다.

농부를 부르셨다면

‘주님 감사하지만 제가 가진

 논과 밭 정리해야 되는데,

카톡 남기시면..’

주님 따르는데

핑계를 많이 됩니다.

그러나 어부는 몸뚱이만

하나 따라 나서는 겁니다.

 우리들은 하루하루 자고

 일어날 때 마다

죽음이 가까워집니다.

이것을 의식하십니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버려야 됩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밥숟가락

하나라도 늘어나고 옷도

늘어나지 줄어들지 않습니다.

제가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내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뭐냐?

도 언젠가는 죽겠죠.

제 장례미사 후 교우들이

“신부님 어땠었대?”하는

 질문에 이런 답 듣는 게

소망이에요.

“신부님 돌아가시고 보니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더라.

수단 한 벌, 구두 한 켤레.”

이렇게 얘기하면 앞으로

아무것도 안 줄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습니다만,

줄 것은 주세요.

잘 모았다가

잘 나눠줄테니까.

 무소유라고 하는

개념은 사실

천주교 용어가 아니죠?

불교 쪽 용어입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

얘기하는 무소유의 개념과

불교의 개념은 다릅니다.

불교는 아예

갖지 않는 것이지만,

천주교는 갖고 있으면서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죠.

갖고 있지만 내 것이 아니고

주인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라는 생각!

청지기는 경영권만 있지

소유권이 없지요?

하지만 아예 애초부터

안 갖는 것은 아니죠.

갖고 있다가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하느님께

봉헌하듯이

봉헌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나도 필요하지만 더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 미련없이

양도하는 것이 천주교의

무소유의 개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공동체성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전혀 다른 성격,

 다른 삶의 모습의 12명이

 그 모든 것을 부수고,

모난 것을 깨면서 둥그런

원 안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눈높이에

 늘 맞추려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겁니다.

어부라고 하는 직업은

공동작업 이었습니다.

배들이 그물을 풀고

몇 시간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동료들은 경험으로,

몸짓으로 함께

그물을 끌어올립니다.

힘세다고 막 잡아당기면

그물이 뒤집어집니다.

힘센 사람은 힘을

 낮출 줄 알았고,

약한 사람은 열심 히

힘을 보탰습니다.

그렇게 똑같은 몸짓으로

 ‘영차!’하면서 눈짓으로

하모니를 이뤘던 겁니다.

공동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은

겸손과 거룩한 입입니다.

 겸손이 없으면

그 공동체는 깨집니다.

고슴도치처럼 늘 사람을

 찌르고 다닐 겁니다.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어둠으로 바뀝니다.

순식간에 그 공동체는

사탄의 밥이 되어 원래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깨지고 말 겁니다.

 물 위에 물건이 떨어지면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침력과 가라앉지 않게

떠받치는 부력이라는

상반된 두 성격의 힘이

그 물건을 다룹니다.

공동체 안에도 자기 마음에

안 들기만 하면 물귀신처럼

끌어내려가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시기, 질투에 헛소문을 내고

 함부로 판단하고

절대 좋은 얘기하지 않고

늘 씹으려고 해요.

아마 예수님이라고

하더라도 떠받들지 않고

끌어내릴 겁니다.

어느 사제가 오더라도

사제 비판만 일삼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이 본당신부로

오셔도 예수님에게

돌을 던질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드러나지 않게

늘 다른 사람을

떠받들어 줍니다.

험담대신 늘 장점만

얘기하고 끌어올려

주려고 애를 씁니다.

백 사람이 험담해도

한 사람의 칭찬은

그 사람을 살립니다.

 세례 받기 전에는

 ‘사람’이지만,

받고 난 다음에

‘ㅁ’을 깍다 보면

‘사랑’으로 바뀝니다.

‘람’과 ‘랑’은 네 귀퉁이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세상에 나올 때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선택받아서 살아갈 때는

사랑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병은 사람을 망칠 수 있어도

사랑은 병에 지지 않습니다.

사랑에 암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어떤 모습에 있는 지요?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이

어부를 선택한 이유는

종말론성입니다.

종말론성은 그날 하루를

마지막으로 알고

살았다는 겁니다.

파도가 칠 때 배를

띄우는 어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놀랍게도

너무너무 잔잔하다가 갑자기

서쪽계곡에서 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잔잔하던

갈릴리 호수가 뒤집어집니다.

큰 배도 아니고 쪽배에

일을 하다 갑자기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면 물속에

잠겼다 나왔다하고,

그야말로 멀리 보이는

우리 동네까지만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살려달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들은

저절로 하느님을 압니다.

그리고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안전한 직업을 가진

사람한테 내세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살아온 인생살이가 만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앞에 있는

사제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되돌아보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던

 순간은 꽃밭 속이 아니라

늘 가시덤불 속이었습니다.

그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주님께

 조금 더 가까워졌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군종신부 할 때 여러

부대를 미사 드리러 다녔는데

어느 부대가 신앙이 좋으냐?

공수부대, 특전사.

특전사에 들어가면 적의

후방에 떨어져서 혼자서

몇 십 명과 싸워서

이겨야 되는 강한 정신과

체력이 있어야 됩니다.

저도 1년 동안 특전사에

근무했었죠.

훈련할 때는 사제복도

벗고 장군들도 별 떼고,

똑같이 비행기를 타요.

낙하산 타고 점프하러.

낙하산 탈 때 장군이라고

날씨가 도와줘요?

신부님이라고 천사가

나타나서 살살 내려놔요?

혹독한 훈련 후 드디어

처음 점프하는 날 비행기

밑에서 미사를 해요.

신자들이든 아니든

열심히 미사를 드려요.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주면 다 총고해를 해요.

불안하니까 그랬겠죠?

왜냐? 확률적으로

낙하산이

만 개가 떨어지면

한 개가 안 펴진다는

통계가 있어요.

이런 고된 훈련 속에서

밑바닥까지 내려간

특전사는 신앙으로

무장되어있어요.

그런데 방위들한테 가서

 미사 드리면 군기가

빠진 것만이 아니라

신기까지 다 빠져가지고

삐삐보고,

애인 사진보고...

농부보다 어부가

더 위험하겠죠?

예수님은 어부한테

한마디 하면 두 마디를

알아들을 것을

아셨던 거예요.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선택받은 자로서

선택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방향이에요.

묵상거리에요.

선택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는

예수님께서 어부를

불렀던 그 이유만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숨 끊어질 때까지

우리들은 선택받은 자의

 삶을 성실하게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

첫 번째는 하느님 앞에

 모든 것의 주인은

그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무소유성이요,

두 번째는 공동체 안에서

교만하지 말고 입조심하고

늘 겸손하게 낮추면서

남을 들어 올려주는

삶을 살라는 의미요,

세 번째 종말론성,

하루하루를

마지막으로 알고

그것이 바로

거룩하게 사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루밖에

안 남아있다하면

용서 못할 사람,

화해 못할 사람,

포기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하루를 마지막으로

알고 사는 것이

바로 성인성녀되는

지름길이요,

또한 종교인이 되려는

유혹에서 신앙인이

되는 길이고,

취미생활에서 살아있는

신앙인의 삶으로 나아

갈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어부들을

부르셨듯이 이 성지에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또 사제의 입을 통하여

우리의 영과 마음을

 정화시켜주심에 감사드리며

신경을 고백합시다.

2017년 연중 제3주일 (1/22)

-배티성지 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배티성지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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