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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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904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04 조회수1,13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9 04 () 가해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Monday of the Twenty-second Week in Ordinary Time

테살로니카 14,13-18 / 코린토 1 2,1-5
루카복음 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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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4,13-18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Reading 1


1 Thes 4:13-18

We do not want you to be unaware, brothers and sisters, about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so that you may not grieve like the rest, who have no hope.
For if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so too will God, through Jesus, bring with him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Indeed, we tell you this, on the word of the Lord, that 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until the coming of the Lord, will surely not precede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For the Lord himself, with a word of command, with the voice of an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of God, will come down from heaven,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Then 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Thus we shall always be with the Lord.
Therefore, console one another with these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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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 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Reading 1


1 COR 2:1-5

When I came to you, brothers and sisters, proclaiming the mystery of God, I did not come with sublimity of words or of wisdom.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I came to you in weakness and fear and much trembling, and my message and my proclamation were not with persuasive words of wisdom, but with a demonstration of spirit and power, so that your faith might rest not on human wisdom but on the power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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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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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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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9 04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사명은 희년의 선포였습니다. 희년은 창조된 모든 것이 희망을 되찾고 기쁨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세상살이에서 기쁨을 박탈당한 하느님 백성의 표상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시며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더 이상 성경에 갇힌 문자가 아니라, 희망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실현된 복음임이 강조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그분을 주님의 영을 받은 메시아이자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된 하느님의 예언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은,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을 알고 지내 온 동향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게 만든 선입견과 편견의 벽이 무엇인지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구약의 대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가, 선택된 이스라엘이 아닌, 구원과 해방을 목말라한 가난하고 겸손한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능력을 전했다는 본보기를 통해 명확하게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더 이상 특권 의식으로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살아 계신 영을 ‘노래하고 환호하며’ 마음에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희년의 기쁨으로 드러나는 현실임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신과 절망의 세상 속에서 믿음과 희망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 눈을 덮고 있는 선입견과 불신의 비늘을 떼어 내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기적은 세상을 다르게 볼 때 시작되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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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8 29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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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831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내용이 복음서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각 복음서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가 예수님의 첫 말씀으로 소개되는데, 일종의 취임 연설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이 돋보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 곧 메시아시라고 선언하셨는데, 나자렛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으로 당신께서 구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분이라고 선포하시자, 고향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못합니다.
둘째는 메시아 예수님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희년 선포라는 점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예수님의 첫 말씀으로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인 복음 선포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다 알지만 따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기차역에서 노숙인들이 사소한 문제로 시끄럽게 다투는 소리를 듣는 순간, 조용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들이 서둘러 자리를 옮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오늘의 복음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곧바로 그 생각을 접기는 하였습니다만, 이런 마음이 지속된다면 “요셉의 아들”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결코 알아볼 수도, 고백할 수 없다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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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 01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 말씀을 봉독하신 뒤 희년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구원 사명의 첫발을 내디디시는 장면을 하나의 장엄한 의식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첫 시작의 새로움과 유일무이함을 드러내는 의식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유명한 작품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에 대한 여우의 말을 통하여 의식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되겠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올바른 의식이 필요하거든.” “의식이 뭐야?” 하는 어린 왕자의 물음에 여우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건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지.
교회의 다양한 의식은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우리의 첫 마음을 기억하게 하며 살아 있게 해 주는 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참된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하는 기도와 전례입니다. 지난 6월의 사제 연수를 통하여 형제들과 함께하는 기도의 힘을 더욱 실감하였습니다. 의정부교구 설정 10주년을 기념하는 사제 연수였는데, 사제 성화의 날(6 27일 예수 성심 대축일) 전날 밤에 모든 사제가 한자리에서 한마음으로 떼제 공동체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두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둘러앉아 바친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교구가 첫발을 내디딘 십 년 전처럼 스스로 쇄신하며 주님의 길로 나아갈 새로운 용기를 얻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특별하며 소중한지를 기억하는 힘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기도와 전례는 이러한 기억을 되살리는 데 크나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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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 0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많은 교우가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한때는 성당에서 활동 많이 했습니다.” “제가 꾸르실료에 참가할 적만 해도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성체 조배도 자주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묵주 기도를 한 주에 300단도 넘게 바쳤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만 같아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자렛 사람들도 두 가지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로 살아온 것을 지켜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지만, 이내 목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얽매여 그분께서 구세주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합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옛 계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일어난 기적의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맺어진 옛 계약만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것도, 하느님 백성이라는 특권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 신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 아닙니다. 지난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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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03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당신의 사명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세상에 알리는 일입니다. , 대희년(大禧年)의 정신을 이 땅에 실현시키심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희년이란 칠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말합니다. 희년에는 빚을 진 사람은 빚을 덜게 되고, 땅을 빼앗긴 사람은 땅을 돌려받으며, 노예 생활을 하는 이는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됩니다. 이처럼 희년은 창조된 모든 것이 기쁨을 누리는 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한 번도 희년의 정신이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이제 희년의 정신은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 한가운데서 완성될 것입니다.
‘있는 나’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하려면 지금 사랑해야 하고, 용서를 하려면 지금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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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8 29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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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8 30)


주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장차 당신께서 이룩하실 사명을 선포하십니다. 그 사명은 인류에게는 대희년(大禧年)이며 구원이 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장차 걸어가실 길의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걸어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리도 우리의 정신과 재능과 시간 등, 온몸과 온 마음을 기꺼이 다 사용하여 이 땅에 주님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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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8 31)


희년은 50년마다 돌아왔습니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다음 해’가 희년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한두 번 맞이하는 대축제였습니다. 희년이 되면 누구나 자신들이 속한 ‘지파의 땅’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농사짓던 땅은 조상 때부터 상속되어 오던 ‘본디 주인’에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빚이 있으면 서로 탕감해 주었고, 유다인 노예들은 모두 해방시켰습니다. 자연히 부자들은 다시 평범해졌고, 가난한 이들은 땅과 가족을 되찾아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빈부의 세습’을 막고, 평등한 세상을 평생에 한 번은 ‘주님의 이름으로’ 경험하게 한 것이 ‘희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영적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엄청난 은총입니다. 지나간 것은 묻지 않을 터이니, 새롭게 출발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실행하시러 오셨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이 새 출발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것 자체가 희년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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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01)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50년마다 실시하던 1년간의 휴식 기간이 ‘희년’입니다. 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재산을 나누던 구약의 대축제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진정한 의미의 희년은 이제 시작된다고 선언하십니다.
돈과 재물을 풀어 놓으며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놀라도록 기적을 행하시는 가운데서 외치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용한 음성으로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증거를 요구합니다. 말하는 근거를 대라고 합니다. ‘카파르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서도 해 보이시오. 그러면 믿겠소.’ 그들은 이렇게 분위기를 망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다면 그들이 정말 믿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이들은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데도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받아들이면 은총이 함께하는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예수님을 제거하려 듭니다. 무서운 진전입니다. 호기심의 끝은 늘 위험합니다. 멈출 줄 아는 이에게만 지혜가 됩니다. 눈먼 이가 다시 보게 되고, 억압받는 이가 해방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 안에서는, 언제라도 ‘희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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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03)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안식일에 맞춰 회당에 들러 예배에 참석하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녔던 회당이라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읽으신 뒤 사람들을 둘러보시니 지난 시절 만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날에 보던 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예언서를 해설하시는 예수님을 낯선 눈길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그 소년 예수였단 말인가? 요셉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던 그 청년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놀라움과 호기심만으로 예수님을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은총을 받아들일 마음 자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충격 요법’을 쓰십니다.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하느님의 기적이 이방인 여자에게 먼저 내려졌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하였습니다. 선입관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입관이나 편견은 그만큼 어리석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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