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0905 -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05 조회수1,50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7
09 05 () 가해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Tuesday of the Twenty-second Week in Ordinary Time

테살로니카 15,1-6.9-11 / 코린토 1 2,10-16
루카복음 4,31-37

 

-------------------------------------------------

 

 

1독서 (홀수 해)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5,1-6.9-11

1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9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Reading 1


1 Thes 5:1-6, 9-11

Concerning times and seasons, brothers and sisters, you have no need for anything to be written to you.
For you yourselves know very well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at night.
When people are saying, "Peace and security," then sudden disaster comes upon them, like labor pains upon a pregnant woman, and they will not escape.

But you, brothers and sisters, are not in darkness, for that day to overtake you like a thief.
For all of you are children of the light and children of the day.
We are not of the night or of darkness.
Therefore, let us not sleep as the rest do, but let us stay alert and sober.
For God did not destine us for wrath, but to gain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who died for us, so that whether we are awake or asleep we may live together with him.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and build one another up, as indeed you do.

 

-------------------------------------------------

 

 

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 2,10-16

형제 여러분,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Reading 1


1 COR 2:10B-16


Brothers and sisters:
The Spirit scrutinizes everything, even the depths of God.
Among men, who knows what pertains to the man except his spirit that is within?
Similarly, no one knows what pertains to God except the Spirit of God.
We have not received the spirit of the world but the Spirit who is from God, so that we may understand the things freely given us by God.
And we speak about them not with words taught by human wisdom, but with words taught by the Spirit, describing spiritual realities in spiritual terms.

Now the natural man does not accept what pertains to the Spirit of God, for to him it is foolishness, and he cannot understand it, because it is judged spiritually.
The one who is spiritual, however, can judge everything but is not subject to judgment by anyone.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so as to counsel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

 

 

복음


+
루카복음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Gospel


Lk 4:31-37

Jesus went down to Capernaum, a town of Galilee.
He taught them on the sabbath, and they were astonished at his teaching because he spoke with authority.
In the synagogue there was a man with the spirit of an unclean demon, and he cried out in a loud voice, "What have you to do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
?the Holy One of God!"
Jesus rebuked him and said, "Be quiet! Come out of him!"
Then the demon threw the man down in front of them
and came out of him without doing him any harm.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And news of him spread everywhere in the surrounding region.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9 05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 때 과연 다음 날 내가 온전하게 일어날 것이라 믿지만, 정작 눈을 뜨고 주님을 마주보는 순간이 닥친다면 과연 그 순간이 내게는 기쁨의 순간일지, 두려움의 순간일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라면,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다면, 우리 인생에 갑자기 어둠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저자의 말씀대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고, 그분 안에 머무는 한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말씀의 권위는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이자 치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마귀의 영에 들린 사람들도 그분의 한 말씀으로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마귀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고 조화롭게 만드시는 권위를 보여 주십니다.
권위란 권력의 자리로부터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권위는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며, 자유와 평화의 삶을 보여 주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의 권위처럼 세상의 힘에 타협하지 않고, 악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악의 굴레와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랑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로서, 교사로서, 지도자로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된 권위를 얻을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8 30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모든 분야에는 제각기 전문가가 있습니다. 과학, 철학, 음악, 경제, 문화 등 분야별로 전문가가 있지요. 그 전문가들이 자기 본연의 일에 정통하고 충실할 때 권위가 있게 마련입니다.
참된 권위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와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권위 있는 자세란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는 나 자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도구가 될 때에야 가능하지요. 나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나의 손을 빌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도록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권위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마귀마저 굴복시키십니다.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는 메시아로서의 권위이지요. 이 세상 모든 생명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의 권위입니다. 그러기에 마귀 들린 사람까지도 다 치유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도 참된 권위를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좋은 방법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지요. 적은 분량이라도 날마다 꾸준히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면 어느새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참된 권위로 무장되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 그 어떠한 악의 세력도 우리 안에 침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01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종말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바로 구원의 때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날이 올까 두려워하면서 걱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이 오지 않아 믿음이 흔들렸다는 표현이 더 옳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피지도 못하고 시든 꽃처럼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완전히 꽃피게 되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희망 속에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누리도록 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종말은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때이므로 그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은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이라는 간청으로 끝납니다.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경이롭게도 우리의 성경은 그 기다림으로 끝납니다.
그 시간과 그 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날은 밤도둑처럼, 진통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마지막 때”(1요한 2,18)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마지막 순간이 앞으로 수십 년 뒤에 닥쳐올지, 아니면 수만 년 뒤에 닥쳐올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종말의 때, 마지막 때라는 특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개인적인 죽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을 숙고하더라도, 우리는 마지막 때,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 02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지금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더러운 영이 무엇인지 성찰해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처와 욕망에서 자라난 병든 영들에 사로잡혀 있을뿐더러 시대 전체를 휘감으며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생명을 앗아 가는 악한 기운에도 짓눌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내적 회심으로 이끄는 기도와 성찰만이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뿌리 깊은 시대의 병든 부분을 식별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또한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호소하는, 현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을 제대로 알아보는 영적 삶을 위한 터 잡기입니다. 특히 사회 병리적 현상과 왜곡된 시각들에서 한 개인이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어제오늘이 아니라 근대적 삶의 기나긴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때때로 예술가들의 예언자적 직관에서 발견하는데, 그 좋은 보기가 19세기 미국의 작가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소설은 ‘근대적 삶의 허무함을 보여 주는 슬프면서도 참으로 순수한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작가는 뉴욕 월가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는 주인공의 ‘하고 싶지 않다’라는 ‘부정’의 대답으로 ‘근대적 삶’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부정’의 원인과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조금은 수수께끼 같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큰 여운을 남깁니다. “바틀비는 워싱턴에서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해고되었다. (중략) 사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절망에 빠져 죽었고, 희망적인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구제받지 못한 불행에 짓눌려 죽었다. 생명의 임무를 받아 나섰건만 편지들은 죽음으로 질주한다. , 바틀비여! , 인간이여!
‘더러운 영’은, 눈에 보이는 업적에 도취되고 풍요의 그늘에서 ‘배달되지 않는 편지’에 희망을 상실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서려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주시는 살아 있는 영을 찾을 때 비로소 ‘더러운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 03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외친 말입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에 왜 훼방을 놓는지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들이 훼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 배 한 척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방에 불빛이 하나 보였습니다. 앞쪽의 배가 지금 당장 방향을 틀지 않으면 충돌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쪽의 선장이 확성기로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방향을 남쪽으로 15도 바꾸시오!” 그러자 그쪽에서도 반응이 빨랐습니다. “당신 배를 북쪽으로 15도 바꾸시오!” 선장은 당황하며 다시 한 번 소리 질렀습니다. “나는 이 배의 선장이오. 지금 당장 방향을 바꾸란 말이오.” 그러자 그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3등 항해사요. 그 배의 방향을 바꾸시오.
불쾌해진 선장이 더 크게 외쳤습니다. “이 배는 거대한 화물선이란 말이오. 그러니 당신네가 남쪽으로 15도 트시오!” 역시 그쪽에서도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여기는 섬에 있는 등대요. 얼른 북쪽으로 15도 돌리시오.” 이 소리를 들은 선장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습니다. 선장이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으면 그 배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뜻이 주님의 뜻과 다르면 누가 그 뜻을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바꾸셔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섬을 옮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도 더러운 영처럼 예수님께 훼방하지 마시라고, 걸림돌이 되지 마시라고 항변하고 있다면 섬을 옮기려는 어리석은 선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04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인간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이웃, 자연,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유다교의 종교 철학자 마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 삶의 근본은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 만남의 관계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물질적인 관계나 거래와 이해타산으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다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에 반하여 ‘나와 너’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관계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기계 문명과 산업 사회는 인간을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아가면서 이웃과 단절된 채 고독하게 지냅니다. 이 고독에서 벗어나려면 참된 만남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만남 가운데 최고의 만남은 주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8 30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채울수록 텅 비어 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고백입니다. 그는 한때 밤새 술을 마시며 궤변을 즐기고, 온갖 쾌락과 열정을 누리려고 세상 곳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오만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인생의 고뇌와 혼란 속에서 머튼이 마침내 받아들인 가톨릭 신앙과 수도원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환희를 안겨 줍니다.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이 세상에서 이토록 놀라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비참하고 소란스럽고 잔혹한 이 지상에, 침묵과 고독 속에서 놀라운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니!(로버트 엘스버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토마스 머튼은 그의 자서전에서 사람들이 세상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러운 영들이 더욱 거세게 달려들어 그들을 온통 절망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말합니다. 그 끝은 파멸입니다. 결국 침묵과 고독 속에서만 놀라운 행복과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고 전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 이상 일할 데가 없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더러운 영들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고요와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이제는 마귀가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러운 영들을 향해 달려가는 꼴입니다.
유혹이 많고 복잡한 시대를 살수록 자신만의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침묵과 고독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는 토마스 머튼이 만난 놀라운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깨닫는 순간부터 세상의 번잡함이 싫어지고 침묵과 고요의 시간이 행복해집니다. 삶이 참 맑고 충만해집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8 31)


더러운 마귀의 영이 어떤 사람 안에서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어떻게 회당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더러운 마귀의 영을 쫓아내시고, 그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주십니다.
마귀는 누구입니까? 마귀는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를 단절시키는 못된 세력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갈라질 때, 거기에는 분명히 못되고 더러운 마귀의 세력이 판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증오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 가운데 마귀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마귀는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습니다. 혹 나에게 공동체를 이간질시키는 못된 습성이 있다면, 그 ‘나’가 바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깨어서 주님의 이끄심에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01)


예수님의 설교에 사람들은 놀랍니다. ‘하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행동에서 ‘천상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판을 깨는’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그를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보십니다.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그를 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신 말씀에 그는 순간적으로 나동그라집니다. 마귀는 그를 내동댕이치며 ‘그에게서 나간 것’입니다. 군중은 놀라 바라봅니다. 눈앞의 기적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당시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분명한 힘이 있습니다. ‘악한 영’을 제압하는 능력입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가 듣는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못 깨닫지만 그때마다 ‘말씀의 힘’은 우리 내면에도 확실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숨은 가르침입니다. 얼마나 경건하게 말씀을 들어야 할는지요?
악한 영은 ‘악한 생각’으로 몰고 갑니다. ‘선한 생각’으로 돌아서고 싶어도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악한 영을 몰아내시는 예수님을 떠올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그토록 많이 들었지만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시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02)


마귀를 몰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만큼 예전에는 마귀 들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르는 병에 걸려도 마귀의 소행이라 여겼습니다. 갑자기 재앙을 만나도 마귀의 간섭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두려워하였습니다. 악한 영이 들이치지 않기를 바라며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사를 지내고 부적을 붙입니다. 명당을 찾고 길일(吉日)을 택합니다. ‘보이지 않는 악한 기운’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 하나를 고쳐 주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하며 초를 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 한마디에 물러가고 맙니다. 두려운 마귀도 당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악한 영’도 하느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지요? 질병입니까? 사고입니까? 예기치 못한 이별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계획 아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악하게 만들고 있는지요? 그곳에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모셔 와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 우리는 주님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은총입니다. 악한 기운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의 이끄심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04)


악한 영을 대표하는 ‘사탄’은 마귀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가끔 사람들에게 들어가 혼란을 불러일으켰으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탄을 몰아내시며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의 놀라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사탄을 두려워하면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사탄을 제압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러한 능력과 힘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그러한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실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예수님의 힘과 권능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탄의 손짓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사탄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은총을 청합시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