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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친구가 되어 줄 때 이미 곁에 와 있을지도 / 연중 제23주일 가해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0 조회수1,125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형제가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 그가 말을 들으면 그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 더 데리고 가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으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그가 그들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타일러란다. 한두 번은 가능할 게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하기는 쉬운 게 아니다. 용서는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용서는 순간의 결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두고 쌓는 거다. 그렇다. 용서는 시간을 갖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리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용서할 수 있다나. 그러나 그건 착각이다. ‘감정 차원으로 해석한 착각이다.

 

순간에 생긴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온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감당하기 어렵다. 미움이 쌓인 시간만큼 수련과 극기가 필요할 테니까. 그것이 무엇일지? ‘작은 용서이다.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작은 용서를 수없이 실천하는 것이다. 작은 게 몸에 배어야만 오랜 기간의 큰 용서가 가능해지리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내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못 준 그 무엇이 없는지를 둘러보는 마음이라나. 율법이 내가 지닌 소유와 집착, 이기심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하는 의무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면,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의 정신을 완성한 것일 게다. 사랑은 자비와 선의로 채워지지만, 그렇다고 악과는 결단코 타협하지는 않으리라. 만연된 불의와 거짓 앞에서 사랑은 침묵하고 인내하기에 앞서 올바른 관계를 세우고자 정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차원의 깨달음과 실천을 품고 있다. 불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가 있을 때 이웃 사랑은 그저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뼈와 살을 가진 실재이다. 그러기에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공범이 된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기억하고, 각성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일컫는 사랑은 그저 아름다운 말로 되는 것이 아닌 실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 기다리는 친구가 되어 주면 어떨까? 삶의 짐을 덜어 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손 붙잡고 믿는 분께 기도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의 비밀스러운 아픔을 품어 주고 함께 아파하며 사랑해 주는 사람,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그를 외면해도 나만은 곁에 남아 그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내가 그런 이 되어 주면 어떨까? 어쩌면 내가 기다리는 그런 좋은 친구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줄 때 이미 내 곁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랑은 함께하는 거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형제,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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